[김경원칼럼]'그 자리' 과연 좋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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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 아래 명당 청기와집까지도/그 자리가 좋기는 좋은가 보네/서로 들어가려고 시끄러운 걸 보면…. '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실린 임영조씨의 시 '그 자리' 에 나오는 구절이다.

정말 서로 들어가려고 그렇게까지 열을 올리고 상대방을 헐뜯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그 자리가 좋기는 좋은' 모양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자리' 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꼴을 보면 도저히 정상적인 사람이 갈 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 자리' 에 들어갈 때는 천하라도 정복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패잔병처럼 어깨에 힘이 다 빠진 상태로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기에 사람의 혼을 그처럼 무자비하게 빼어놓는 것인지 신비롭기까지 하다.

한때는 그 자리에 들어간 사람이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그 자리에 오르셨는데도 인제 '그 자리' 에서 내려오실 때는 별로 명예롭지 못한 모습이 된 것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 자리' 는 들어갈 때도 바로 들어가야 하지만, 거기에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만 나올 때 영광스럽게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같은 백악관을 떠나는 장면이었지만 닉슨의 치욕적인 모습과 레이건의 영광된 모습은 흑과 백의 대조를 이뤘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면 '그 자리' 에 있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것이 공평한지 안 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자리' 에 오르면 '그 자리' 를 바로 전에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일을 어떻게 해 놓았는가에 따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결정되는 것 같다.

운이 좋아 전임자가 일을 잘 해 놓았으면 인수받은 나라살림을 한층 더 좋은 차원으로 올려놓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지 못하고 전임자가 일을 그르쳐 놓은 경우에는 우선 잘못된 부분을 푸는 일이 급하다.

바로 다음 대통령이 놓이게 될 상황이 그렇다.

다음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금융에 따른 구조조정부터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경제정책의 선택의 폭이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 구조조정에 따르는 사회적 대가도 치러야 한다.

실업자는 늘어나고 임금은 억제돼야 하며 정부재정은 긴축에 긴축을 해야 한다.

선거운동에서 유권자들의 귀에 달콤하게 들리도록 늘어놓았던 여러가지 공약사업은 거의 모두 제쳐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로 당선된 대통령으로서는 너무나도 신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경제는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한가지 희망은 우리 국민이 이 어려운 조정기를 성공적으로 이겨내면 우리 경제는 더욱 튼튼한 체질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새 대통령은 바로 이 점을 국민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통일.외교분야에서도 다음 대통령의 과제는 전임자가 만들어 준 꼴이 됐다.

우선 좋건 싫건 4자회담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북한과의 관계도 이제 새로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대미 (對美) 관계도 지엽적인 문제 가지고 쓸데없이 신경이나 건드리는 차원에서 벗어나 북한 문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공동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동맹 (同盟) 간에 지금까지 누적된 상호불신의 장벽을 넘어 상식과 이성이 통하는 대화를 통해 이뤄나가야 한다.

그밖에도 정치.사회.교육.문화 등 그야말로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제한돼 있다.

5년은 잠깐 지나간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5년 후에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또 어떻게 달라지도록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 하는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시간의 흐름에 맞춘 구체적인 변화의 비전없이, 예를 들면 막연히 '개혁' 이라는 구호만 부르짖다가는 5년이 다 지나간 다음 자신이 무엇을 해 놓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허망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 자리' 는 그저 오르기만 하면 되는 자리가 아니다.

'그 자리' 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다.

김경원 <사회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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