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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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준비가 끝난거요?" 어두운 기억의 여파를 털어내지 못한채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준비는 끝났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소. 설령 괜찮지 않다고 해도 이젠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뇨?"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서둘러 끝내기나 했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좋아요. 그럼 예전에 선생님이 앉으셨던 자리에서 시작해서 지금 여기, 이 창가로 다가와 얘기를 끝내는 걸로해요. 물론 멘트는 선생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만… 가능하면 에메랄드 궁전에 초점을 맞춰 주셨으면 좋겠어요. "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천천히 오른쪽 두번째 줄, 뒤에서 두번째 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그리고는 의자 옆에 서서 이예린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구도를 재는 듯한 눈빛으로 고래를 갸웃거리다가 자리에 앉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손을 밑으로 내리는 시늉을 했다.

곧이어 카메라의 위치가 정해지자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가 큐 사인을 내게 주었다.

"열여덟이었던 그때,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한 여선생님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일생에 오직 한번 밖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겪을 때처럼, 그리고 깊은 열병을 치를 때처럼 저의 영혼은 끝없이 비상하고 때로는 추락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교단에서 아주자주 '오즈의 마법사' 에 나오는 에메랄드 궁전에 대해 말하곤 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찾아가는 첫번째 에메랄드 궁전, 그리고 고난을 극복한 뒤에 다시 찾아가게 되는 두번째 에메랄드 궁전…… 그것은 꿈과 현실을 상징하는 서로 다른 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열여덟이었던 저는 꿈과 현실의 간극에 뼈저린 인생의 고뇌가 깃들어 있다는 걸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현실에 의해 꿈이 무산되는 에메랄드 궁전이 아니라, 꿈에 의해 꿈이 유지되는 아름다운 에메랄드 궁전만을 내 마음에 세워두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에게 에메랄드 궁전의 서로 다른 의미를 가르쳐 준 사람, 그녀를 내 꿈의 궁전에서 평생 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나의 멘트를 듣고 있던 이예린은 거기서 재빨리 컷 사인을 주었다.

그리고 장소 이동, 나는 창문 옆으로 다가가 교실에서의 마지막 멘트를 준비했다.

카메라를 옮기는 동안 나는 교실 바닥에 보자기 크기만하게 깔린 잔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빛살이 슬그머니 가슴으로 스며들어 온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예린의 큐사인을 받고 나서 나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이렇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마흔셋이 된 지금, 저는 열여덟이었던 당시의 제 무지와 열정과 고뇌를 조금도 부꾸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흔셋이 된 지금까지도 제 가슴에 꿈의 궁전이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꿈의 궁전을 내 가슴이 아로새겨 준 사람이 싸늘한 현실의 궁전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 지금도 여전히 아프게 되새겨질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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