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회담,미국·일본정상 한국지원 약속 들여다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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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캐나다 밴쿠버의 아태경제협력체 (APEC) 정상회의 현장에서 24일 (한국시간 25일) 열린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회담은 이전과는 판이했다.

지난해 마닐라회의 때 金대통령은 북한 잠수함 사건에 미온적이라며 클린턴대통령을 난처하게 했지만, 이번에는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다.

클린턴이 한국의 국제통화기금 (IMF) 자금 요청과 관련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 는 수사 (修辭) 를 동원해 지원을 다짐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金대통령은 IMF의 또 다른 주도국인 일본의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총리로부터 "IMF지원 체제가 확보되는대로 적극 협조하겠다" 는 얘기를 들었다.

두 정상회담은 국제사회를 긴장시키는 이슈가 한국금융위기임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배석한 반기문 (潘基文) 외교안보수석은 "이런 입장표시는 IMF지원 결정과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 이라고 평가했다.

해외투자가의 한국 금융시장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潘수석은 기대했다.

미.일 정상이 이렇게 뒷받침하는데는 세계 11위의 경제규모인 한국 경제 추락이 세계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도 깔린 것으로 우리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APEC현장에서 우리측은 도와달라는 하소연과 함께 '한국의 불행은 다른 나라의 곤경' 이라며 '전염병론' 을 거론하고 있다.

전날 외신기자들에게 김기환 (金基桓) 대외경제협력대사는 "전염병같은 외환위기를 선진국들이 도와주지 않아 한국에서 막지 못하면, 다른 나라로 퍼질 것" 이라고 주장했다.

金대통령도 "한국 금융시장이 안정되면 아시아 금융시장이 안정되고, 세계 정치.경제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 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APEC 회의에서는 한국 외환위기에 공동 대처하자는 '연대감' 을 표명하는 선언문의 채택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미.일 정상은 조건을 달거나 충고를 했다.

하시모토총리는 "한국도 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고 주문했다.

클린턴대통령은 회담전에 "긴급지원을 요청한 해당국 당국자들이 '책임있는 정책' 을 수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IMF가 판단하게 될 것" 이라고 예고했다.

여기에는 한국경제 전반에 대한 불신이 강하게 깔려있다.

APEC 현장에서 외국 관리나 언론들은 한국 정부의 정책추진력이 형편없다고 낙제점을 매기면서 기업.금융계.노조등 한국의 모든 경제주체에 대한 의심을 늘어놓고 있다.

이날 회담에서 구체적인 지원 내용은 없었다.

APEC회의도 거기까지 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두 정상의 협조발언이 IMF지원의 액수.조건 결정과정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밴쿠버 = 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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