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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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촬영팀과 내가 송라읍에 당도한 건 오후 두시경이었다.

다리를 건너 읍거리로 진입하기 직전부터 나는 언제 내가 마지막으로 이곳을 다녀갔던가, 하는 걸 되새겨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부분에 관한 기억은 구체적으로 떠오르질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곳, 그리고 대학 진학을 한 뒤로는 집이 서울로 이사를 한 탓에 자연스럽게 발길이 끊어졌던 곳 - .이십대 시절의 언제였던가, 여행을 하던 길에 잠시 머물다 갔던 기억 말고는 더이상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여기가 어딘가.

내 기억에 각인된 송라읍과 현실의 송라읍이 너무 다르게 느껴져서 나는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기억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라곤 오직 한 가지, 읍거리를 곧게 관통해 나가는 도로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낯선 이방인의 눈빛으로 나는 극장이 있던 자리와 읍사무소가 있던 자리, 교회가 있던 자리와 서점이 있던 자리, 만화방이 있던 자리와 양장점이 있던 자리를 가늠해보았다.

하지만 비슷한 흔적으로도 그것들은 이미 지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명치끝에 무언가가 딱딱하게 뭉쳐지는 듯한 느낌을 견디기 어려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예린이 사뭇 걱정스런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

"설마… 이미지 쇼크 같은 것 때문에 말문이 막혀 버리신 건 아니겠죠?" "아니요. 그런게 아니라…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날 때처럼 기분이 몽롱할 뿐이요. 인간은 언제나 변화속에서 살지만, 이렇게 엄청난 시차를 두고 그것을 확인하니 정말 허망하군요. 어느날 갑자기 전생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을 때… 그때 자신을 에워싼 현실의 풍경이 이렇게 생경스럽고 낯설게 느껴질까?" "이 선생님, 우리는 지금 에메랄드 궁전을 찾아가는 길이예요. 그러니까 초장부터 흔들리지 마시고 마음을 굳게 먹으세요.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에 남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밖으로 눈길을 돌리지 마시고 가능하면 선생님 내면에 집중하세요. 어차피 에메랄드 궁전은 거기서 찾아야 하니까요. " 도로와 인도, 그리고 가로수로 심어진 플라타너스와 규격화된 상가 건물을 내다보며 그녀는 감정이 억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그런 일이 말처럼 쉽사리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소. 내면의 집중력을 유지하려면 기억의 각질이나 외피라도 견고해야 할 텐데… 막상 이곳에 진입해 보니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소. " 지금이라도 모든 걸 체념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인듯,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갑자기 밝아진 음성으로 그녀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추억보다 더 맛있는 걸로 점심식사를 하러 가요. 배가 고프면 더 우울해지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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