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욱의 경제세상] 전운 감도는 무역전쟁, 美 USTR 보고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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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호 02면

제국주의도 세 종류가 있다. 미국이 맹주로서 다른 나라들을 휘하에 거느리는 수퍼 제국주의, 미국과 유럽 등 강대국이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자제하면서 세계 질서의 조화를 추진하는 울트라 제국주의, 자국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강대국이 서로 싸우는 라이벌 제국주의가 그것이다. 장담하건대 지금까지 세상이 수퍼 제국주의였다면 앞으로는 라이벌 제국주의가 될 것이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세상은 요동칠 것이다. 이번 경제위기가 어떻게 극복되든 무관하게 일어날 일이다. 미국은 상처를 입었고 급격히 달라질 게 자명하다. 과소비와 과잉 유동성으로 유지해 오던 ‘세계의 시장’ 기능을 포기할 것이다.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외국과의 경제 전쟁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역사가 입증한다. 1990년대 중반 미국은 당시 쌍둥이 적자를 줄이기 위해 일본과 살벌한 무역전쟁을 벌였다.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대일(對日) 무역수지 적자가 일본의 보호장벽 때문이라면서 시장 개방을 강요했다. 일본도 발끈했다. 엔화를 겨냥한 재팬 본드를 발행해 재정적자를 메우라고 약 올렸다.

한 일본 각료는 미국 재무장관더러 ‘괘씸하다’는 질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어딜 감히(?), 일본은 졌다. 한국도 된통 당했다. 악명 높은 수퍼 301조를 들이밀며 공세를 펴는 미국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더랬다.

미국은 또다시 이 전쟁을 벌일 것이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은 자기 힘으로 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대한 적자에 시달리면서도 중국이나 일본 등이 자국 채권과 주식을 사 줌으로써 버텨 왔다. 평균 저축률 제로에 가까운 미국인의 과소비 자금줄도 따지고 보면 이런 돈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세계 소비시장으로서의 미국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빚내서 물건을 사는 소비 패턴은 크게 달라진다. 파생 금융상품을 통해 과잉 공급되던 달러 유동성도 이제는 줄어든다. 외국은 더 이상 호구 노릇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새로운 기축통화를 만들자는 요구는 그리 실효성은 없겠지만 그래도 세계 경제에 파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사는 법은 분명하다.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를 줄이는 길이다. 자국 시장에 빗장을 걸고 상대 국가의 시장 개방을 압박할 것이다. 환율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 물론 이 전쟁은 공정무역의 이름으로 진행된다. 벌써 그런 조짐이 일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며칠 전 연례 무역장벽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미국 농민과 제조업자들을 위해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시장 개방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했단다. 이를 위해 “외국의 주요 무역장벽 목록을 만들어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하거나 협상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다. 미구에 닥쳐올 미국의 공세를 어떻게 뚫을 수 있을까. 답답할 때 옛 어른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도 방법이다. 2000년 전 중국 전국시대 때의 합종책을 쓰면 어떨까. 소진은 약소국들이 힘을 합쳐 강대국에 맞서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침 주변에는 중국과 일본, 아시아가 있다. 한·중·일 3국만 놓고 봐도 상호 교역량은 상당히 많다. 한국으로선 중국과 일본이 수출 상대국 1위와 4위 국가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한·중·일 3국 간 협력도 그리 쉽지 않다. 연횡책도 더불어 써야 한다. 약소국이 강대국을 섬기며 그의 도움으로 난세에 살아남는 비법으로 우리는 이미 아주 좋은 걸 갖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그것이다. 미국이 재협상을 요구하든 안 하든 우리는 무조건 국회 비준부터 받아 놓아야 한다. 미국이 재협상을 요구하면 한국만 머쓱하게 된다고? 그래서 비준을 하지 말자고?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릴 할 때가 아니다. 약소국의 비애이지만 그게 우리의 현실인데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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