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강물 젓는 사공의 마음엔 격랑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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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호 13면

감상에 앞서 번역자의 해설, 저자의 머리말 등을 두루 살피는 게 이 소설에서만큼은 유익할 듯싶다. 소설은 뉴밀레니엄맞이가 떠들썩하던 2000년 홍콩의 시사주간지 ‘아주주간’ 주최로 문인·평론가 등 중국 문학 전문가 14명이 선정한 ‘20세기 중국 소설 100강(强)’에서 2위에 올랐던 작품이다. 1위는 중국 사회주의 문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루쉰(魯迅)의 소설집 『납함』이었다. 국내에도 친숙한 모옌의 작품은 18위, 쑤퉁·위화 등의 작품들은 80위권 아래로 처졌다.

『변성』, 심종문 지음, 정재서 옮김, 황소자리, 208쪽, 1만2000원

하지만 이런 ‘문학적 성공’은 문화혁명이 끝나고도 몇 해 뒤인 1970년대 말에야 시작된 것이다. 사회주의 이념이 서슬 퍼렇던 40년대 소설은 좌파 진영으로부터 “현실 변혁 의지가 결여돼 있고 계급적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 소수민족 묘족(苗族)의 피가 섞인 저자 심종문(1902∼88)은 문단에서 축출된 데 이어 여러 차례 사상 개조까지 받았다.

34년 저자가 쓴 머리말에는 ‘당대와의 불편함’이 적나라하다. 심종문은 말한다. 자신의 작품은 학교 근처에 가 보지 못한 사람, 평론가들의 거짓말이나 유언비어에 오염되지 않은 소수를 위한 것이지, 그것들에 동조하는 다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번역자인 이화여대 정재서 교수는 소설의 ‘문학적 복권’이 우선 80년대 이후 중국 문학의 한 갈래로 등장한 뿌리 찾기, 심근(尋根) 문학과 관련 있다고 분석한다. 지방 문화의 가치에 눈 돌렸다는 것이다. 소설은 또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이상향 주장에도 부합한다고 한다. 결국 이념의 시기에 현실 도피로 치부됐던 소설이 중국 사회의 개방에 따라 재평가돼 운명이 바뀐 것이다.

사설이 꽤 길었다. 눈치채셨는가. 소설은 표지의 채색 수묵화처럼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역동적이기보다 잔잔한 강물이다.배경은 중국 남부 쓰촨성과 허난성의 접경, 다둥성 인근의 나루터. 『변성(邊城)』이라는 소설 제목처럼 단오절 배 경주 등 지방 문화가 살아 있는 변방의 작은 마을이다. 일흔 살의 주인공 사공 노인은 나룻배로 사람들을 강 건네주고 관에서 월급을 받는다. 미안해진 손님이 뱃삯이라도 건넬라치면 극구 사양하고는 오히려 차와 잎담배를 권하는 안분지족한 노인이다.

걱정이라곤 없을 것 같은 노인의 속은 그러나 들끓는다. 15년 전,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핏덩이 손녀딸을 남기고 딸과 사위가 차례로 자살한 상처가 아직 생생한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딸 취취는 어느덧 결혼 적령기다. 여기서 또 비극이 찾아온다. 일등 신랑감들인 이웃 동네 형제가 나란히 취취를 사모한 것. 형제 사이에서 줄타기하느라 노인은 절로 늙는다.

소설 속 세계는 이를테면 아직 상품의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압도하지 않는, 필요한 만큼 만들어 만들어진 만큼 사용하는 물물교환기의 세계다. 이런 세계에서 사람들은 이웃의 사정에 속속들이 밝고, 적대적이더라도 맹목적이거나 잔인하지 않다. 이 때문에 세상은 평온한 듯하다. 소설이 단순히 잔잔함에 그치지 않는 것은 이런 바탕 위에서다. 그런 평화로움의 이면, 사공 노인과 두 형제, 형제의 아버지 사이에 흐르는 갈등의 실상을 저자는 치밀하게 보여 준다. 강의 저류는 표면과는 다르게 흐른다.

번역자는 『변성』이 중국 현대문학의 한 중요한 측면을 보여 준다며 권한다. 잔잔하면서도 도도히 흐르는 중국 현대문학이라는 강물이 궁금하다면 다둥성을 방문해 그 흐름을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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