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역사앞에 떳떳한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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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같아선 미국 대통령의 활동이 신문지면을 차지하는 빈도가 우리보다 오히려 잦아진 느낌이다.

역사에 이름남길 대통령을 추구하는 집권2기 클린턴의 발걸음이 바빠진 까닭이다.

지난주 텍사스주의 조지 부시 전대통령 기념관 개관식에 전현직 미대통령들 내외가 자리를 함께 했다.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갖게하는 장면이었다.

아직도 평화적 정권교체를 엄청난 역사적 과업인양 떠들어대는 우리 형편에선 선거에서 이기고 진 전현직 대통령들이 어깨를 나누는 모습이 감동적일 때가 있다.

미국 역대대통령들의 활동과 관련된 자료들은 워싱턴이 아니라 미국각지에 흩어져있는 각대통령 기념도서관에 가야 만날 수 있다.

기념관은 대개 대통령의 고향에 자리잡는다.

하지만 이를 두고 지역주의라 말하는 이는 없다.

사실 요즘처럼 역대 미대통령들에 얽힌 얘기들이 동시에 화제로 등장한 적도 없는 듯 하다.

케네디대통령이 쿠바 미사일위기 대책을 논의하는 국가안보회의 과정을 비밀녹음한 테이프가 공개돼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후세에 들려주고 있다.

또한 존슨대통령이 이발사와 가격흥정하는 대목이 녹음테이프에 잡혀 그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단순히 화제거리로 넘기긴 아깝다.

이들 역대 대통령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녹음을 지시했다곤 하지만 결국 이같은 기록들이 쌓여 길지않은 미국의 '역사 바로세우기' 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국가원수의 생각과 말한마디까지 국민들이 알 권리가 있고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알려져야 한다는 데 미국의 어떤 대통령도 이견을 단 적이 없다.

대선을 앞두고 우리 대통령의 의중이 오리무중이다.

판에 끼어든 정치인들은 그만두고라도 국민들로서도 짜증나는 일이다.

자신의 떳떳치 못한 대목, 부끄러운 구석을 숨긴채 최고통치권자의 칼을 휘두르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잘못이다.

그리고 갖은 술수를 부리며 대통령을 주변에서 싸고도는 이들이 역사앞에서의 심판은 커녕 정권이 바뀌어도 숨긴 비밀을 보험삼아 연명하는 꼴은 이제 사라져야 마땅하다.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는 나라의 역사는 존중받지 못한다.

그리고 역사앞에 떳떳하지 못한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얼마 남지않은 대통령의 힘이지만 사실을 밝히는 데 쓸 수 있을 때 후세에 무시당하지 않는다.

길정우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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