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반론

한·미 FTA 미루면 그르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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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3월 25일자 김석한 재미 변호사 글에 대해.

‘한·미 FTA 서두르면 망친다’는 제목의 김석한 변호사 글은 국제 협상이 주권국가 내부의 정치경제적 현실과 국제관계와의 연관 작용에서 이루어진다는 본질을 간과하고, 미국의 주장을 그대로 전달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우선 그는 한국 국회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준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면서 미국 내 정치경제적 현실을 고려해 자동차 관련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미국이 자동차 분야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지만, 미국의 책임있는 당국자 가운데 지금까지 “재협상해야 한다”고 요구한 인사는 없다. 미국 일부 정치인이 자신의 표밭인 자동차 분야를 의식해 인기 영합적 발언을 하긴 했어도, 이미 서명까지 마친 한·미 FTA를 다시 협상하자는 요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임을 미국 당국자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한국이 먼저 비준하면 한국의 유연성과 선택권만 좁힐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명한 전략가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유연성과 선택권을 제한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한국이 먼저 비준함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21세기 최초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호주의로 회귀해서는 안 된다는 세계 지도자들의 공통된 인식을 한국이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둘째, 아직도 한·미 FTA를 흠집내 정치적인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집단에 국내적으로 이 논쟁이 종결되었음을 선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자동차 분야를 변경하자는 미국의 재협상 요구를 상당히 부담스럽게 만들 수 있다. 한마디로 한국이 명분 싸움에서 미국을 압도할 것이라는 얘기다.

만약 한국이 비준을 미루면 어떤 결과가 닥칠지 생각해 보자. 미국이 자동차 분야의 불만을 터뜨리는 와중에 한국이 비준하지 않고 있다면, 미국은 한국이 재협상할 생각이 있다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국 정부가 왜 재협상을 원치 않는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자동차 분야 재협상을 요구하게 되면 협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국은 다른 분야를 협상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자 할 것이고, 이 와중에 재협상 의제에 대한 논란이 또 다른 정쟁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반미 세력이 꺼진 촛불을 들고 다시 길거리로 몰려 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김 변호사는 지난해 4월 쇠고기 전면개방 협상결과의 수정을 미국이 수용한 것을 예로 들면서 이번에는 한국이 미국의 변화된 정치현실을 인정해 자동차 관련 조항을 수정할 차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쇠고기 협상은 그 자체로서 완성되는 단일 의제 협상이었고, 협상 결과는 과학적인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적인 저항에 직면했다. 반면 자동차 부문은 많은 협상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내에는 자동차 관련 조항에 불만을 가진 집단도 있지만, 한·미 FTA의 조속한 발효를 촉구하는 광범위한 지지세력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자동차 문제만으로 미국이 재협상을 들고 나오고 한국이 강력하게 반발해 한·미 FTA가 위태롭게 될 경우, 미국 내 한·미 FTA 지지세력도 사태를 그냥 수수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임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한국 측 전략가들이 이미 인식하고 있듯 미국의 불만을 반드시 자동차 분야 재협상만으로 해결해야 할 이유는 없다. 창조적인 타협안이 존재한다. 문제는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와 의회가 이런 인식을 공유하는가이다. 그런 인식의 공유를 위해서라도 한국 국회가 비준을 미루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이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