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사기범 왜 잘 붙잡히나 했더니 …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지난달 19일 미국 버지니아주 프레더릭스버그 근처 고속도로 노상.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강제로 정차시킨 차량에 다가가 고소장을 들이밀며 “당신이 스탠퍼드지?”라고 물었다. 운전자는 “맞소”라 대꾸했다. 80억 달러(약 10조원) 규모의 양도성예금증서(DC) 판매 사기 혐의로 지명 수배된 미 스탠퍼드 파이낸셜그룹 앨런 스탠퍼드 회장이 붙잡히는 순간이었다.

세계 최대의 금융사기범 버나드 메이도프도 지난해 12월 그의 맨해튼 펜트하우스에서 체포됐다. 그는 650억 달러 규모의 금융 피라미드 사기를 쳐 종신형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피신하지 않았다. 메이도프 밑에서 17년간 일했던 회계사 데이비드 프릴링도 부실 재무감사로 감옥행이 예고됐으나 도피하지 않은 채 FBI에 체포됐다. 이 밖에 5억5000만 달러의 고객 돈을 횡령한 카네기멜런대의 자금관리인과 1억 달러 규모의 투자 사기범 제임스 니컬슨도 사기 행각이 드러난 뒤 무기력하게 체포됐다.

금융사기범들이 피신하려고 하지 않은 채 줄줄이 감옥으로 가고 있다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이 24일 보도했다. 미국이 남미·유럽 국가들과 범죄자 인도조약을 맺어 안전하게 피신할 만한 나라가 줄어든 데다, 범죄자들이 외국으로 피신해 성형수술을 하는 등 외모를 바꾸더라도 현대의 컴퓨터 기술로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이 금융기관에서 돈을 빼낼 때 국제 금융감시망에 거래 내역이 적발될 확률도 높아졌다. 빅 오보이스키 전 미 연방보안관은 “금융사기범들은 전화하거나 편지하지 않고는 돈을 인출하기가 아주 힘들다”며 “해외로 도피 계획을 잘 짜지 않으면 해외로 탈출해도 곧바로 문제에 부닥친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미 범죄자 추적 TV 프로그램 ‘미국의 범죄자(America’s Most Wanted)’나 인터넷 인맥 사이트 페이스북 등에서 세계 곳곳에 숨은 주요 범죄자들을 추적해 피신할 곳이 마땅치 않게 됐다고 IHT는 전했다.

반면 범죄조직 두목들은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 오면 해외로 달아나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보스턴 윈터 힐 갱단 두목인 제임스 볼거는 1999년 해외로 사라진 뒤 아일랜드 더블린이나 이탈리아 시칠리아 등에서 목격됐다는 증언이 나왔으나 여전히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대니얼 리치먼 미 컬럼비아대 법학 교수는 “많은 화이트칼라 범죄자들은 자신들이 똑똑해 배심원들을 설득,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경향이 있다”며 “한마디로 한심한 범죄자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재홍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