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도량형전' 내일부터 11월24일까지 국립민속박물관서 열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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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쌀 한 되 주이소. ” 지금도 시골 싸전에서는 이런 주문소리가 간혹 들리지만 싸전주인은 양이 아닌 무게로 대충 0.8㎏을 내놓는다.

쇠고기는 한 근, 고구마나 감자는 한 관으로도 팔리지만 저울 눈금은 어김없이 그램이다.

미터법에 익숙한 어린이들에게 우리 선조의 지혜가 담긴 전통 도량형은 접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22일부터 11월24일까지 경복궁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릴 '한국의 도량형전' 이 모처럼의 기회로 다가온다.

삼국시대부터 금세기초까지 민간에 널리 통용되다가 1902년에 서양식 도량형제가 도입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 자.되.저울 등 전래 도량형 기기 3백50여점을 전시, 전통 도량형의 변천사를 한눈에 읽도록 꾸몄다.

인류는 일찍부터 길이나 양을 측정할 때 사람의 신체부위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손으로 한줌에 잡히는 분량이 한 움큼이고 두 팔로 껴안을 정도의 길이가 한 아름, 사람 하나 정도의 길이가 한 길, 두팔을 잔뜩 벌린 길이가 한 발로 통했다.

양의 단위는 또 논밭에서 나는 곡식의 소출량과도 관계가 깊다.

조선시대 소출량 단위였던 결 (結).부 (負).속 (束).파 (把) . '파' 는 낫으로 가을걷이를 할 때 한손에 쥐어질 정도의 벼에서 얻어지는 나락의 양으로, 대충 한 홉이 된다.

그리고 한 다발로 묶을만한 벼에서 얻어지는 양이 한 되, 지게로 한 짐 짊어질 만큼의 벼에서 나오는 양이 한 말로 통했다.

선조들이 나름대로 측량에 따를 부정의 여지를 가급적 줄이기 위해 고안해낸 아이디어는 애교스럽기까지 하다.

일부 되가 윗부분이 바닥보다 좁은 것은 양이 더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고안이었다.

고봉인 경우는 별개지만 곡식을 평미레 (방망이) 로 고르게 밀면 힘을 들이는 정도에 따라 쌀 사이의 공간에 차이가 나 되에 담기는 양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 또 되의 윗부분 모서리에 철조각을 붙인 것도 나무로 만든 되의 윗부분을 칼로 깎아내 양을 속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와 일연의 '삼국유사' 에 부피단위인 합 (合.홉).승 (升.되).두 (斗.말).석 (石.섬) 과 길이 단위인 촌 (寸.치).척 (尺.자) 장 (丈.열자) 등이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이때 이미 도량형 사용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사용됐던 저울추와 이를 제작한 틀로 보이는 석제 (石製) 거푸집이 출토됐다.

이 거푸집에는 '一斤' 이라는 명문까지 새겨져 있다.

이런 단위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실제 무게나 길이에서는 크게 달랐다.

조선시대만 해도 중국 주나라의 기준척이었던 주척 (周尺) 을 국가 기준척으로 정했는데도 불구하고 목수들은 그들대로 영조척 (營造尺) 을 썼으며 포백 (布帛) 을 재는데도 별도로 포백척이 쓰이는 등 다양한 기준이 혼용됐다.

그래서 '삼척동자 (三尺童子) 도 다 안다' 에서의 1척은 대략 30㎝정도 되는 영조척이고 '구척장신 (九尺長身)' 에서의 1척은 대략 20㎝인 주척을 기준으로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도량형의 기준이 혼용되자 국가기강을 확립하려는 역대 임금들은 대체로 도량형을 통일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야만 조세의 형평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방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런 역사의 흔적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시되는 것이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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