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원칙없는 공직비리 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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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관급공사를 둘러싼 설계.감리업계의 담합입찰비리와 공직자 뇌물수수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의지가 크게 흔들리는 모습이다.

업체간 사례비만도 7백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비리가 밝혀지고, 다수의 고위공직자들이 수사대상에 올라 국민들의 충격과 관심이 큰 상태지만 검찰은 마무리단계에서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비리공직자에 대한 사법처리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수백만원을 받은 지방 중하위직 공무원을 구속했던 검찰은 이보다 훨씬 많은 1천만원대의 뇌물을 받은 민선단체장 등은 불구속 기소키로 했다고 밝혔다.

물론 불구속과 구속을 구분하는 잣대가 뇌물액수의 다소에만 있지 않고 불구속수사도 형사처벌임은 분명하나 검찰의 결정을 보는 시민들은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책임이 더 크고 뇌물도 더 받은 고위직을 불구속하고 하위직만 구속한 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검찰의 결정에서 뚜렷한 원칙과 기준을 찾아볼 수 없다.

검찰은 수사초기에 뇌물을 받은 수백명의 명단이 적힌 업체의 비밀장부를 입수했으나 수사범위를 최소화했으며, 그나마 사법처리 수준도 막바지에서 크게 후퇴했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어려운 경제현실과 공직사회에 대한 영향을 고려한 조치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도 특정당적을 가진 단체장을 구속할 경우 나타날 정치권의 반응과 공직사회의 동요가 선거에 미칠 영향 등이 고려된 듯하다.

얼마전에도 정부의 대대적 사정계획이 선거용이라는 정치권의 반발로 무산된 적이 있다.

공직비리에 대한 수사가 이런 식으로 이뤄져서는 부정부패의 척결은 백년하청 (百年河淸) 이 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엄중한 사정작업이 가능한 경제상황은 어떤 것이며, 비리수사가 공직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런 식의 수사는 오히려 썩은 공직자들에게 면역성을 길러줄 뿐이다.

공직비리의 척결은 따로 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특정집단을 위한 것도 아닌 우리 사회의 절대적 과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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