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없던 중소기업 기술 서울대와 손 맞잡자 훨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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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연구력이 부족해 어렵게 개발한 제품을 썩히나 걱정했지요. 이제야 숨통이 틔는 것 같습니다.”

8일 오후 서울대 정밀기계연구소의 한 사무실. 금색 링이 촘촘히 박힌 쇠 노즐을 만지던 한도철강 김종수 이사의 표정이 밝았다. 곁에 있던 서울대 기계공학부 이우일 교수는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를 상품화할 수 있어 나도 기쁘다”며 김 이사의 손을 잡았다. 이곳은 지난 3일 법인 등록을 마친 조인트벤처 아이젠텍(IGENTECH)의 사무실이다. 아이젠텍은 철강 분야 중소기업인 한도철강과 서울대기술지주회사(STH·Seoul Techno Holdings)가 5대 5로 출자해 탄생시킨 회사다.

서울대 기술지주회사의 첫 자회사인 아이젠텍을 탄생시킨 주역들이 제품을 놓고 의견을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김종수 한도철강 이사, 이우일 서울대 기계공학부 교수, 백동현 아이젠텍 대표. 오른쪽은 주력 제품인 ‘가벤’ 노즐. [김형수 기자]


지난해 11월 설립된 서울대기술지주회사의 첫 자회사인 아이젠텍은 플라스틱을 사출할 때 가스를 없애주는 노즐인 ‘가벤’을 양산할 예정이다. 한도철강의 특허를 이우일·홍국선(재료공학부) 교수팀이 이론화 작업을 거쳐 최적화된 상품으로 만들어 낼 계획이다. 서울대 브랜드가 붙자 벌써부터 국내외 대기업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소기업과 서울대의 상생=‘가벤’이 개발된 건 2006년 초다. 뜨겁게 녹인 플라스틱을 틀에 쏘아 모양을 잡는 사출성형 과정에서 플라스틱 안의 수분·가스는 표면에 기포를 만드는 주범이다. 그러나 가벤은 액화 플라스틱을 회전시키며 주변에 뚫린 ‘나노 크기’의 미세 구멍을 통해 가스를 제거한다. 10%대의 플라스틱 사출 불량률을 0.7% 수준으로 낮추는 획기적인 기술이다.

하지만 제품을 시장에 내놓기는 쉽지 않았다. 제품의 효능을 입증할 수치가 필요했지만 연매출 40억원 규모의 중소기업엔 버거운 숙제였다. 김 이사는 “중소기업 제품이니 관심을 보이는 회사가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중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할지도 난제였다”고 털어놨다.

이런 고민을 하던 한도철강은 지난해 말 서울대 기술지주회사가 러브콜을 보냈을 때 이를 선뜻 받아들였다. 플라스틱 사출성형 분야 전문가인 이우일 교수가 동업자로 나섰다. 이 교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안타까웠다. 연구팀이 축적한 실험 기술을 통해 제품을 최적화시켜 시장에 내놓겠다”고 다짐했다.

시장 반응도 달라졌다. 서울대 연구팀이 합류했다는 소식에 대형 전자·자동차 회사들이 제품을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아이젠텍 대표를 맡은 기술지주회사의 백동현 투자지원실장은 “외국의 한 휴대전화 업체는 가벤 노즐을 채용하면 사출성형기 한 대당 1개월에 1만2000여 달러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며 “3년 안에 300억원대의 연매출을 올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가벤 신화 잇겠다”=아이젠텍 사례는 그동안 대학이 특허 기술을 맡고, 기업은 제조·유통을 담당하던 기존의 산학협력 사례와 차별화된다. “특허·기술뿐 아니라 서울대의 인적자원과 브랜드를 적극 활용해 사업을 벌이겠다”고 강조해 온 노정익 지주회사 사장의 취지와도 부합된다. 기술지주회사는 서울대 연구기술력을 활용해 제약·디자인 분야의 자회사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기술지주회사 조서용 기술사업화실장은 “올해 안에 두세 개 자회사를 더 설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임미진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대학기술지주회사=대학의 축적된 연구성과와 인적자원·브랜드를 활용해 수익을 내는 회사. 법인화를 앞둔 서울대는 자립을 위한 수익구조를 위해 지난해 11월 기술지주회사를 출범시켰다. 비슷한 사례로 한양대의 HYU홀딩스와 삼육대의 SU홀딩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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