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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화 시대 젊은이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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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요즘 서울에서는 세계 각국의 음식을 손쉽게 즐길 수 있다. 이탈리아.프랑스.아랍.멕시코.태국.베트남.인도.파키스탄은 물론이고 중국요리도 지역별로 없는 게 없다. 눈부신 변화다. 외국인 관광객을 더 많이 유치해야 한다는 얘기만 나오면 늘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관광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엔 너무 먹을 게 없다. 한식도 하루 이틀이다. 국제도시를 자처한다면서 세계 각국의 음식이 없는 곳에 누가 오려 하겠는가.

이제 그런 걱정은 접어도 된다. 미국의 각종 패밀리 레스토랑, 패스트 푸드나 슬로 푸드 체인까지 없는 게 없고 낯익은 ××다방보다 스타벅스 찾기가 더 쉬울 지경이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 온다 해도 입맛에 맞는 음식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다. 적어도 자국에서 즐겨 먹던 외국 음식은 비슷하게나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 각국의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레스토랑이 이렇게 번성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외국 노동자들이 물밀듯 들어온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 음식점을 찾는 고객의 대부분은 한국인이고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이른바 외국물을 먹은 사람들이 많아진 20~30대가 주류다. 그들이 밖에 나가서 먹어본 이국적인 먹거리에 대한 추억이 외국 음식점들을 번창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1990년대 순수 관광목적으로 출국한 내국인은 매년 200만~300만명이었다. 이른바 외환위기 때 잠시 주춤했지만 2001년 210만, 2002년 300만, 2003년 400만여명으로 늘었다. 유학생도 마찬가지다. 80년에 1만3000여명이었으나 매년 꾸준히 늘었고 2003년엔 약 16만명이 외국으로 공부길에 나섰다. 따라서 요즘은 매년 700만명 이상이 이런저런 이유로 외국여행을 한다.

20~30대 젊은이들의 외국경험은 그 총량에서 50~60대에 비해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20~30대가 그 윗세대에 비해 국제적으로 더 균형잡힌 세련된 시각을 갖고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이 외국에서 보고 들은 것은 고작 돈을 쓰는 자기 자신뿐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돈을 노리는 외국인들의 모습만, 원화의 위력만 본 것일까. 압도적으로 많은 젊은이가 한국이 세계 최고라 생각하며 민족의 자존심이 국제정치의 현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민족적 자부심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치게 앞세우면 이성보다는 감성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마는 우를 범하기 쉽다.

주한 미대사로 내정된 크리스토퍼 힐은 최근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한국의 젊은이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미국은 앞으로 한국 젊은이들의 생각에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말이다. 얼핏 들으면 신임 대사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미국은 한국 외교가, 특히 대미 외교가 한국의 젊은이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생각의 일단을 내보인 것 같다. 아니면 기성세대가 어떤 이유에선가 젊은이들에게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들에게 끌려가고 있다는 질책으로도 들린다.

국가 간의 관계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수렴된다. 한국의 국가적 이미지가 자기중심적인 섣부른 열정으로만 형성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이재학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