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북한 외교관형제의 망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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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번에는 북한 대사가 망명했다.

노동당 비서를 지낸 황장엽 (黃長燁) 의 망명에 이은 북한 핵심인물들의 체제이탈 현상이다.

이집트 주재 장승길 북한대사 부부가 제3국의 보호아래 망명절차를 진행중인 것이 25일 확인된데 이어 그의 형인 프랑스 주재 북한대표부 장승호 참사관도 가족과 함께 잠적중인 것으로 알려져 북한 권력층 내부의 동요가 가속화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들 형제가 동시에 잠적했다는 것은 서로 의논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아무리 형제사이라고 하지만 북한같은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그만큼 장대사 형제와 같은 수혜층 (受惠層) 의 북한체제에 대한 절망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북한사회의 내부통제와 기강이 허술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같은 북한내부의 움직임은 체제경쟁에 익숙했던 냉전시대라면 우리가 쾌재 (快哉) 라도 부를 일이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무리 작은 변화라도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민감한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변화는 냉전적 시각에서가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장래와 연관해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에 대응하는 정부의 자세도 신중해야 한다.

정부가 이번 장대사 형제의 망명과 관련해 우선해야 할 과제는 이들의 의사가 존중돼 국제적인 관례에 따라 처리되도록 관계당사국들과 긴밀히 협력하는 일이다.

아울러 이들의 망명이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일이 없도록 냉정하게 행동해야 한다.

구태여 이들을 국내에 데려오려고 서두를 필요도 없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다.

어느 시기엔가 우리 품에 안길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순리에 맡기는게 바람직하다.

국내정치도 문제지만 장기적인 안목 (眼目)에서 남북한 관계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 외교관 형제의 망명을 다루는데 있어 정부는 또 북한의 대응책을 염두에 둬야 한다.

북한은 1차적으로 망명사실을 부인하며 남한의 납치극이나 조작극으로 몰아붙일 가능성이 있다.

북한의 행태로 보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다.

북한이 그러한 반응을 보일 경우 이제 막 시작된 4자회담 예비회담이나 경수로 (輕水爐) 착공으로 기대되는 남북한 협력의 분위기에 좋지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장대사 일가의 망명은 또 점증해 온 탈북자들이 급증할 수도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은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탈북자를 수용해야 할 남한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럴 경우 국가차원의 대비책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처럼 신중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은 북한이 두려워 자극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북한에 개방을 강요하는 인상을 주지말고 북한 스스로 체제의 모순을 깨닫고 필요성을 느껴 문을 열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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