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1조6천억 방출 배경·문제점…"금융대란 급한불 끄고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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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통화당국이 하루에 1조6천억원이라는 뭉칫돈을 푼 것은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위기감에서 나온 처방으로 볼 수 있다.

돈을 풀어 금융시장을 진정시키는 것이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재정경제원이나 한은도 잘 알고 있다.

최근 8일간 한은이 금리안정을 위해 푼 돈은 무려 5조5천억원에 달한다.

전체 통화량의 1.5%에 해당하는 돈이 짧은 기간중 집중 방출되면서 금리 오름세는 진정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시차를 두고 물가를 자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금융불안 근본대책은 역시 기아사태의 해결과 종금사의 경영정상화 뿐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짧은 시간내에 쉽게 결론을 볼 수 없는데다 당장 쓸 수 있는 수단은 제한돼 있다는 점이 당국의 고민이다.

최근의 금융위기는 금융권에 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돈이 제대로 돌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이므로 자금방출 효과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돈이 풀렸다고 이것이 모자라는 곳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돈가뭄에 시달리고 있지만 상위 3대 재벌은 어느 은행돈을 쓸지 고르고 있다.

은행에는 돈이 여유있게 돌고 있지만 신용이 나쁜 종금사들에는 흘러가지 않고 있다.

한은이 자금을 방출한 뒤에도 D종금은 시중은행에 기업어음 (CP) 보증을 요청했다 퇴짜맞았고 C, S종금등은 수십억원대의 예금주들이 잇따라 해약절차를 문의해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결국 자금시장에 보이지 않는 칸막이가 생겨 돈이 제대로 흐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돈을 자꾸 퍼붓기만 하면 자금사정의 양극화현상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K종금의 한 임원은 "돈을 아무리 풀어도 원하는 곳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 것이 문제" 라며 "선거철을 앞둔 상태에서 돈을 풀면 물가를 자극하는 부작용만 나올 수 있다" 고 말했다.

앞으로가 더 문제다.

당장 다음달 일본계 은행의 반기결산기가 되면 한국계 금융기관의 외화조달은 더욱 어려워져 은행.종금 할 것 없이 모두 '외화보릿고개' 를 넘어야 한다.

태국 바트화가 국제결제은행등의 자금지원에도 불구하고 하락세를 멈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 역시 국내 외환시장에 잠재적인 불안요인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시장이 불안할 때마다 돈을 퍼주는 방식으로 넘어가는 것도 한두번이다.

통화당국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 조만간 대대적 제2금융권 대책이 마련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비해 종금사들도 나름대로 자구노력을 벌이고 있다.

스스로 살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결국 홀로 일어서기 힘든 곳은 인수.합병을 통해 정리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재경원도 제2금융권의 구조조정을 구상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종금업계 내부에서도 난립해 있는 종금사들을 정리해 장기적인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H종금 임원은 "30개 종금사가 모두 자구노력을 통해 살아남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며 "쓰러지거나 서로 통폐합해 절반정도로 줄어들 것" 이라고 말했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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