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들리는건 '빚' 소리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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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들리는건 빗소리뿐' 하면 시라도 한편 나올 것같지만 '빚소리뿐' 하면 빚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빚쟁이들의 독촉만 연상된다.

불행히도 요즘 한국인들 화두 (話頭) 는 이 빚소리가 으뜸이다.

다른 화두, 예컨대 대통령후보의 기상도 변화나 대형 비행기참사의 수수께끼는 시한부생명에 불과한 것, 언젠가는 그 속사정을 알게 된다.

그러나 빚에 관한 얘기는 기업이 존재하고 은행이 움직이는한 끝이 없을 것같다.

어디 그 뿐인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은 들려도 빚이 없어졌다는 소식은 들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닌가.

빚이란 말과 약속이란 말은 동전의 앞뒤를 이룬다.

빚을 주고 받을 때는 빚을 갚는 약속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빚진 사람이 돈을 갚겠다는 약속을 안지키고도 상대방을 궁지에 모는 방법을 일본작가 미시마 유키오 (三島由紀夫.1925~70) 가 창안해낸 적이 있다.

그의 아이디어는 이렇다.

돈을 꿔준 친구가 빚을 갚으라고 말한다.

돈을 꾼 당신은 "아 그거 내일 받아" 하고 가볍게 퉁긴다.

그리고 내일이 와도 안 갚는다.

기분이 상한 친구는 사방팔방 다니며 당신의 욕을 한다.

약속을 안 지키는 자에게 다시는 돈을 꿔주지 않겠다고 떠든다.

이윽고 돈을 꿔준 친구는 야비 (野卑) 하고 그릇이 작은 인물로 소문이 난다.

운이 좋으면 당신은 정말로 돈을 안 갚아도 될 구실을 얻는다.

요즘 정부가 나서서 대기업들이 서로 서준 빚보증을 해약하라고 불호령을 내리고 있다.

은행은 은행대로 기업들의 신용도에 따라 등급을 매겨 C, D등급에는 대출을 안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정부나 은행이 왜 야비하고 그릇이 작다는 소문이 돌 것을 무릅쓰고 이렇게 각박한 짓을 하는지 그 이유가 짐작이 안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기업이 신봉하던 회계원리를 뒤집으려는 속마음이 있는 것같다.

지금까지의 회계원리는 '기업경영을 장미빛으로 유지하려면 회계장부를 뻘건색으로 물들일 것' 아니었던가.

이제 빚더미 위의 경영은 탈피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온 것같다.

'돈의 가장 좋은 사용법은 빚을 갚는 일' 이라는 평범한 격언이 돋보이는 시절이 왔다.

그러나 빚정리는 채권자와 채무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정부의 원칙만은 계속 준수돼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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