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대선 돈 덜쓰는 선거 가능할까] 재계 입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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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재계는 '돈 덜쓰는 선거를 하자' 는 정치권의 움직임을 환영한다면서도 실현가능성에 대해선 의아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비자금사건으로 법정에 서는등 홍역을 치렀던 모 (某) 그룹 회장은 최근 사석에서 "정치권에서 정치자금법을 개정해 선거풍토를 바꾸겠다고 하니 우리로선 더이상 바랄게 없지만 생각만큼 쉬울 것같지는 않다" 고 토로했다.

그는 또 "지금까지의 선거에서 기업들이 정치권에 자금을 댄 것을 일방적인 정치권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며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 점이 정치자금문제를 푸는 핵심"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선을 4개월여 앞둔 현시점에서 기업들의 선거자금에 관한 인식은 확실히 과거와는 다르다.

모그룹 고위경영자는 "92년 대선과정과 비교할 때 기업들이 최근 정치권에 지출한 지원금 규모는 기업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크게 줄어든 것만은 사실" 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여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이번에 돈을 잘못 썼다가는 하루아침에 파멸' 이란 분위기가 많았다" 며 "인사성 떡값을 주려해도 정치권에서 오히려 거절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고 전했다.

지원방식도 과거와 달라졌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전경련등 재계 공동으로 자금을 모아 전달하는 것은 물론 특정 그룹이나 기업차원에서의 지원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고 말했다.

이때문에 학연.지연등 개인적 연줄을 찾아 지원할 수밖에 없는데 정치권이 워낙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라는 것. 이같은 재계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 대한 돈은 결국 기업들로부터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은 기업관계자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신한국당 경선과정에서도 예비후보자들이 평소 친분을 유지해왔던 기업인들로부터 경선자금을 지원받았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또 정치자금을 주지 않을 경우 밉보여 해당 기업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의식도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 부도설이 돌았던 모그룹의 경우 신한국당 경선 당일 지지하던 후보의 낙선이 확실시되면서 제2금융권에서 수백억원대의 어음을 돌린 게 결정적 원인이 됐다는 루머가 돌았던 것이 한 예다.

재계는 정치권이 돈 덜쓰는 선거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정치자금 실명제등 제도적 장치가 우선적으로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경련이 출자해 올 봄 설립된 자유기업센터는 최근 이 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통해 "정치인 개인이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받는 정치자금인 떡값을 근절하기 위해선 모든 정치자금 수수를 선관위를 통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1인당 기탁금 액수를 엄격히 제한하는 방식으로 후원회 제도를 활성화하되 음성적인 정치자금 거래를 막는 것이 돈안드는 선거를 위한 핵심" 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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