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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과오' 털고 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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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과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정부가 했던 일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재벌대책이다. 정권출범 초기엔 으레 강도 높은 대기업 압박책이 나왔다. 부동산의 강제매각과 총수의 사재(私財)출연, 검찰을 동원한 표적사정에 이르기까지 방법과 강도는 달랐지만 재벌 두들기기는 매한가지였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재벌기업들은 일단 납작 엎드려 청와대의 눈치를 봤다.

새로 출범한 정권의 참신함을 드러내 보이는 데는 재벌 때리기만큼 효과적인 게 달리 없었다. 이전 정권과 재벌을 싸잡아 정경유착의 부패집단으로 몰아세움으로써 새 정부의 차별성을 극대화했다.

일단 정권 초기에 재벌을 호되게 길들여 놓으면 나중에 정부 정책에 고분고분 따르게 하기가 쉬워진다는 부수효과도 있다. 고용증대와 수재민 돕기 성금 갹출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필요에 따라 재벌을 동원해야 할 일은 무궁무진했다. 재벌들은 이 과정에서 새 정권의 의중을 읽고 정권은 재벌들과의 새로운 관계정립에 나선다.

다음 수순은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 간의 회동이다. 덕담과 당부가 오가고, 경제발전을 위해 진력할 것을 다짐한다. 재계는 이때 정부가 지목하는 '선물'을 자율 결의 형식을 빌려 발표하는 게 관례였다.

새 정부가 출범한 뒤 정권과 재벌그룹의 관계는 외견상 과거 정권에서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이 보인다. 대선자금 수사와 재벌개혁 정책, 그리고 그에 뒤이은 재계 총수와의 회동까지 일련의 과정이 과거의 양태 그대로다. 그러나 이번 정부 들어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점은 정경유착의 가능성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 점에서 재계는 이제 정치자금의 부담에서 확실히 벗어났다. 반겨 마지아니할 일이다.

그런데도 재계는 아직 움츠러든 어깨를 펴지 못하는 것 같다.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어쩐지 주눅든 기색이 역력하다. 그 배경에는 우리나라 재벌이 아직 떨치지 못한 원죄와 숙명이 있다.

개발 연대에 정부는 재벌그룹들을 고속성장의 선봉대로 삼았다. 일단 파이를 키운 뒤 나중에 나누자는 약속과 함께 나라의 자원을 정책적으로 몰아주었다. 한국의 재벌은 한국 경제의 견인차이자 압축성장의 수혜자였다. 이 과정에서 정권과 재벌을 연결시킨 끈이 다름아닌 정경유착이요, 정치자금이었다.

한국의 재벌구조는 이 같은 한국적 정치환경과 사회풍토에서 적응하고 진화해온 최적의 기업조직 형태다.

문제는 개발 연대를 살아온 많은 이들은 당시 재벌이 축적한 부(富)를 사유재산으로 보지 않고 언젠가는 분배해야 할 공유 재산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엄연히 사유재산인 재벌가의 부와 경영권에 대해 정당성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인 사적 소유제도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런 인식은 최근 팽배한 반(反)기업 정서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러다 보니 정권 교체기마다 '국민정서'를 앞세워 재벌을 두들기는 것이 당연시됐다. 그러나 언제까지 재벌 때리기를 계속할 것인가. 지금 대기업의 투자 이외에 한국 경제를 살릴 방법은 없다.

이제 한국 재벌의 원죄를 씻는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들이 사회에 기여할 몫을 정하는 대신 정당성을 확실히 인정해 주자. 그래서 이들이 더 많이 투자하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서도록 밀어주자. 음습한 밀실에서 정치자금을 건네는 대신 밝은 광장에서 사회적 약자와 공익을 위해 마음껏 돈을 쓰도록 하자.

김종수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