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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팔, ‘두 개의 국가’를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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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948년 건국 이후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일곱 차례나 주변국들과 전쟁을 치렀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스라엘은 이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전략적 관점에선 그 어느 전쟁도 이스라엘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갈등의 핵심은 지난 60년간 사실상 변한 게 없다.

47년 11월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분할해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나눠주는 결의안 181조를 채택했다. 두 개의 국가가 설립될 것을 염두에 둔 조치다. 그러나 때론 팔레스타인이, 때론 이스라엘이 거부하는 바람에 이 결의안은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오늘날까지 양쪽에서 죽고 죽이는 충돌이 거듭되는 이유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영토 문제에 합의하지 못한다면 갈등은 끝없이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두 나라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다. 40년의 세월이 걸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이스라엘을 인정했다. 그러나 2006년 총선에서 강경 무장정파인 하마스가 온건파인 파타당(黨)에 승리하면서 팔레스타인은 다시 이스라엘을 부정하던 과거 상태로 돌아갔다.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평화롭게 지내길 거부하고 있다. 기껏해야 임시적인 휴전에 동의하는 정도다. 이스라엘 역시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이미 이스라엘 정착민 20만 명이 존재하며, 향후 정착촌을 추가 건설하겠다는 입장에 무게가 쏠려 있다. 두 나라가 공존하는 해법이 과연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조차 의문시된다.

최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양측 간 전쟁은 이런 부정적인 예측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특히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이번 전쟁으로 온건 노선을 걸어온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과 그가 이끄는 파타당이 큰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실됐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군사적인 면에서 심각한 타격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큰 정치적인 성과를 거뒀다. PLO를 대신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합법적인 대표 역할을 떠맡게 된 것이다. 이는 하마스의 총선 승리 이후 서방세계가 하마스를 약화시키기 위해 취했던 갖가지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조만간 가자지구에서 포성이 멎고 희생자들이 땅에 묻히고 나면 정치적 해결의 수순에 접어들 것이다. 국제사회의 중재로 시작된 휴전은 장기화할 것이고 가자지구의 재건이 시작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서방세계는 하마스와의 대면(對面)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압바스와 파타당은 평화 협상의 상대가 되기엔 너무 힘이 약화돼 버렸기 때문이다. 하마스는 협상 과정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갈 테고, 이스라엘을 쳐부수려는 의지를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평화란 사실상 불가능해질 것이니 평화 협상 자체가 무의미해질 터다.

그 경우 한시적인 휴전을 이끌어 내는 것 외에 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결국 두 개의 국가라는 해법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이다. 또한 무력 충돌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인도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양쪽 모두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양측을 궁지에서 구해낼 수 있는 건 오직 외부 세력뿐이다. 무엇보다 미국이 나서서 문제 해결을 위해 시리아와 이란을 끌어들여야 한다. 두 나라가 개입하면 많은 게 달라질 수 있다. 또한 결단력과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 모든 이해 당사자가 두 개의 국가라는 해법을 받아들이도록 관철시켜야 한다. 만약 이 방법이 실패한다면 오바마 정권은 집권 초기 내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넘어 중동 지역 전체가 위험한 국면에 빠져드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부총리 겸 외무장관

정리=박경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