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은 차례상 준비를 포함하여 모든 가사 노동의 폄하가 그 첫째 원인이 아닌가 싶다. 모두가 번듯하고, 직함도 우아한 직업만 선호하고 있는 요즘에 별로 사랑하지도 않는 시댁 식구들과 죽은 조상들 입과 귀만 즐겁게 할 뿐인 제사 음식 준비를 즐겨 하겠다는 젊은 며느리는 당연히 많지 않을 것 같다. 또 가사 노동의 불평등한 분배 문제가 있다. 물론 점점 개선되어 가는 추세이긴 하지만 아직까지는―특히 친척들이 모이는 명절에는―여성이 더 집안일을 많이 하게 되어 있는 구조가 우리네 전통이다. 세상이 빠르게 바뀌어 가는 만큼 나이 많은 시어머니들은-기성세대가 갖고 있는-희생정신이 부족한 젊은 며느리들에 대한 분노와 실망도 점점 더 커져 가는 것 같다(실제로 젊은 세대 중에는 힘없고 병든 늙은 부모에게 모든 의무를 돌리고 자기 것만 철저하게 챙기는 염치없는 이도 적지 않다).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구성원끼리 서로 만나니 가정이라는 조직의 원심력, 즉 해체되려는 힘과 구심력, 혹은 하나의 집단이 되어 엉겨 붙으려 하는 힘이 충돌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쉽게 말해 젊은 세대는 하루빨리 자신들만의 영역을 쌓아 부모 세대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기성세대는 자식들을 품 안에서 조종하고 싶어 한다. 물론 이런 원심력과 구심력이 모두 병적인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순기능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명절이 괴로운 사람은 어쩌면 이런 시끄러운 집안의 갈등을 철저히 외면하고 오로지 마우스·리모컨만 붙잡고 명절을 지내야 하는 이들인지도 모른다. 미워할 가족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철저하게 고독한 소외계층이 그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사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의 끈 때문이지만, 그 끈이 만약 자신에게 아픈 족쇄뿐이라고 느낀다면 이 꼴 저 꼴 보지 말고 과감하게 자연의 유장함에 홀로 몸을 던져 보는 것도 좋겠다. 굳이 해외가 아니더라도 한국에는 겨울 풍광이 숨 막히게 아름다운 곳이 참 많지 않은가. 반대로 부엌에 갇혀 풀려날 시간만 기다리는 구차한 처지에 어쩔 수 없이 놓여 있다면 요리와 가사 노동 그 자체를 일종의 명상과 기도의 시간으로 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나눔의 밥차’ 같은 곳에서 봉사를 해도 그 정도의 일은 해야 한다. 14대 종부가 사반세기 동안 맞벌이하면서 일 년에 열두 번의 떡 벌어진 제사상과 수시로 찾아오는 손님 밥상에 이골이 난 끝에 나름대로 마음 공부한 후 내린 군색한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