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점. 양판점서 대량구매 싸게 팔아 가전사 대리점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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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A가전사 대리점의 박명규(가명.51)사장은 요즘 하루에도 몇번씩“이 장사를 계속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가 든다.

며칠 전 이웃 친지에게 5백40ℓ짜리 냉장고를 팔았을 때의 일이다.

할인점의 가격공세에 대응,평소 권장소비자가격에 10%정도이던 할인율을 17.6%로 늘려 89만원에 팔았다.4층건물 꼭대기층까지 낑낑대며 배달해준 비용도 안받았다.

그런데 몇시간 후 친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E마트 분당점에서는 배달해 주면서 82만7천원이라는데,이럴 수 있는 겁니까.” 그럴 수가 있나 싶어 계산기를 두드려봤다.사실이라면 할인율이 무려 23.4%나 된다는 얘기였다.

이 냉장고 출고가는 86만4천원.결제일을 앞당겨주는 대가로 받는 리베이트 5%까지 몽땅 고객에게 돌려준다 해도 판매가능한 최저 가격은 82만8백원. 배달료 1만5천원을 감안하면 밑진다는 결론이었다.그나마 사장인 자신이 배달꾼 역할까지 해야 냉장고 한대 팔아 겨우 6천2백원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것.이런 식이니 朴사장이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대리점이 존폐위기를 맞고 있다.대형 할인점.양판점등이 싼 값으로 소비자들을 공략하면서 대리점의 입지가 급속도로 좁아지고 있다.소비자 입장에선 싸게 살 수 있어 좋겠지만,특히 가전제품 대리점은 죽을 지경이다.

값으로는 도저히 E마트.킴스클럽등 할인점이나 전자랜드21과 같은 양판점을 당해낼 도리가 없다.

그나마 안면등으로 명맥을 유지하곤 있지만 2년전 1억원 이상이던 A대리점의 월매출이 이제는 5천만원 채우기도 벅찰 정도가 됐다. 그래도 오디오.카메라등은 아직 마진이 괜찮아 전체적인 마진은 평균 10%선.매출 5천만원에 5백만원쯤 남는데,임대료.관리비.종업원 2명 인건비등으로 나가는 비용은 한달에 5백46만원. 결국 朴씨는 부부가 하루 10시간을 꼬박 일하고도 한달에 50만원 가까이 밑지는 장사를 하고 있는 셈이다.朴사장은“점포정리도 쉽지 않아 버티고 있지만 언제 집어치우게 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지었다. 다른 대리점들도 사정이 비슷해 점포를 정리하는 곳도 수두룩하다.A대리점 주변의 대리점 5곳중 3곳이 올들어 계약을 취소했다.국내 가전3사의 전국 대리점이 지난해말 4천2백69개에서 5월말 현재 4천1백98개로 71개나 줄었다.

신설대리점을 제외할 경우 1백23곳이 완전폐업했으며,대리점 주인중 10~15%가 손을 떼는 것을 검토중이라고 대리점협회 관계자는 밝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이마트등 양판점(여러 회사 제품을 한꺼번에 파는 곳)은 지난해말 34개에서 5월말 현재 46개로 늘어났다.양판점 1곳당 월매출액(평균 10억3천만원)이 대리점의 14배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올들어 대리점 1백65개에 해당하는 양판점이 생긴 셈이다.

대리점이 양판점이나 할인점에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기본적으로 구매력(바잉 파워) 때문이다.한꺼번에 많이 사니까 원가가 싸고,인건비.임대료등 부대 비용이 덜 드니까 고객들에게 낮은 가격에 파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울전자유통이 운영하는 전자랜드21의 경우 가전대리점 3백15개를 합쳐놓은 것과 같은 규모의 24개 직영체인점에 공급할 물량을 단일 구매팀이 조달하고 있다.

이 회사는 삼성.LG.대우등 3대 가전사로부터 공장도가보다 통상 8~12% 싼 값으로 물건을 납품받고 있다고 한다.결제일 10일이내의 최우량 대리점이 받는 리베이트가 최고 6.5%인 점을 감안하면 출발부터 경쟁이 안되는 것이다.

전자랜드21은 최근 대우전자의 25인치 TV(모델명 DTQ2575S)를 한꺼번에 1천대나 구입,소비자가보다 37.5% 싼 39만9천원에 팔면서도 10%이상의 마진을 남겼다.일반 대리점에서는 50만원에도 판매가 불가능한 제품이다.

여기다 제조업체들은 신제품을 낼 때마다 반의무적으로 전속 대리점에 1~2대씩은 할당하는데,실패작일 경우 고스란히 대리점 부담이 된다.제조업체 영업소들이 재고처리를 위해 10% 할인등의 조건으로 밀어내기 하는 것도 대리점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잘 팔리고 마진율 좋은 제품만 골라 파는 양판점.할인점에 대리점이 밀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지요.”한 대리점 사장은 이렇게 하소연했다.

가전제품에 비해서는 다소 덜하지만,화장품등 다른 업종도 대형 할인점 등장 이후 대리점이 급속도로 위축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15년전 양판점 출현 이후 당시 90%를 넘던 대리점의 시장 점유율이 지금은 30%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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