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브이세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시계 전광판을 보면서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의사의 질문에 우풍은 잠시 침묵 속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광화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덕수궁 돌담길을 끼고.왼편으로 논밭이 펼쳐지고 있습니다.보리밭 같습니다.”“논밭이라구요?” 의사와 검사,변호사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도시 미관을 위해 인공으로 만들어놓은 작은 논밭이 광화문 근방에 있잖아.” 변호사가 목소리를 낮추어 중얼거렸다.

“논길을 내가 걸어가고 있어요.한없이 뻗은 길이에요.그 길 끝에서 어머니가 달려오고 있어요.내가 달려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요.” 우풍이 두 팔을 들어올려 어머니를 껴안는 시늉을 하였다.

“기억에 혼돈이 일어나는 모양입니다.이만 깨워야겠습니다.아무튼 9월30일 11시11분경에는 시청 근방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최면을 통하여 확인한 셈입니다.기억에 착오가 없는 한 말입니다.” 의사가 하나,둘,셋 하며 손뼉을 탁,치자 우풍이 부스스 눈을 떴다.하지만 그 최면술을 통한 알리바이는 명백한 증거자료가 될 수 없었다.게다가 11시11분 무렵에 택시를 타고 교통체증에 막히지 않고 범죄현장으로 달려온다면 12시경에 도착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태수와 변호사는 그 이후에 우풍을 면회하면서,우풍이 광화문 근방으로 간 날 한참동안 인공 논밭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그렇다면 적어도 9월30일 12시경에는 우풍이 범죄현장에 있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누가 나서서 그 사실을 증명해줄 수 있단 말인가. 우풍의 변호사 허명준은 그 최면술 실험이 있은 후,강도 강간 미수죄에 관한 한 우풍의 무죄 사실을 더욱 확신하고 피해자 최민순과 송원지의 피해자 진술서를 면밀히 검토하는 가운데 모순점들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한편 니키 마우마우단원들은 그날 폐허 마을 뒷산을 타고 넘어가 산 속에 버려져 있는 오두막 하나를 발견하고 거기에 들어가 하룻밤을 보냈다.그 오두막을 임시 비트로 삼자는 의견도 있었으나,경찰 수사망이 거기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얼마 동안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길세가 근무하는 주유소를 연락 거점으로 하여 때를 봐서 다시 모이기로 하였다.

니키 마우마우단의 범죄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고 할 때도 소년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피의자의 사진 같은 것이 실리지 않아 니키 마우마우단원들은 혼자서 행동하는 한 쉽게 잡히지는 않을 것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