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감옥’ 찾아간 설기현 금욕의 중동 담금질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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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설기현(30·알힐랄)에게 사우디아라비아는 축구밖에 할 일이 없는 곳, ‘축구 감옥’이다.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를 연고로 하는 명문 구단 알힐랄에 임대선수로 입단한 설기현은 16일 입단식을 치르고 팀 훈련을 시작했다.

축구는 만국 공통어지만 전혀 색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더구나 이곳은 이슬람 제국의 종주국. 중동에서도 가장 엄격하게 율법을 적용하는 곳이다.

리야드 시내에는 ‘할라스 광장’이 있다. 번역하자면 ‘끝장 광장’이다. 율법을 어긴 자들을 공개 처형하는 신의 영역이다. 설기현은 외국인이지만 예외가 아니다. 술과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루 다섯 차례씩 행해지는 기도에 동참할 필요는 없지만 식당 휴무 등 일상생활이 올스톱되는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 지난해 사우디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대회에 2주간 동행했던 송준섭 팀닥터는 “내가 가본 곳 중에서 가장 답답한 곳이었다. 날씨보다도 외국인을 천시하는 듯한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사우디인과 어떻게 인간관계를 쌓아가느냐도 설기현이 풀어야 할 과제다. 여성에게는 운전면허증조차 발급하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이다. 그래서 설기현은 아예 부인과 자녀들을 한국에 남겨두고 건너갔다. 에이전트사는 영국에서 일했던 직원을 당분간 사우디로 파견해 적응을 돕기로 했다. 여성은 생활하기 힘든 곳이라 부인 대신 설기현의 남동생이 위로 방문할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그나마 리야드에 두산·GS 등 한국의 건설사가 다수 진출해 있고, 교민도 700여 명이나 되는 게 위안이다. 한국 식당도 몇 군데 있다고 한다.

설기현은 지금까지 늘 모험과 도전을 통해 성장해 왔다. 또래들이 유럽 진출을 꿈도 못 꾸던 2000년 과감히 벨기에 리그에 진출했다. 4년 후에는 벨기에의 명문 안더레흐트를 박차고 잉글랜드의 2부 리그인 울버햄프턴을 선택해 축구 종주국으로 건너왔다. 도전을 피하지 않은 끝에 설기현은 2006 독일 월드컵이 끝난 뒤 프리미어리그 레딩에 발탁됐고, 풀럼에서 뛸 기회도 잡았다.

축구 감옥 사우디는 설기현이 한 단계 더 성장할 도약대가 될 수 있다. 또 설기현의 모험 덕분에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중동 축구의 전문가를 얻게 됐다. 중동 축구에서 그가 체득할 경험은 한국팀에 아주 유용한 정보가 될 전망이다.

이해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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