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구호식량도 빼앗는 북한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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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세계식량계획(WFP)이 북한의 기아(饑餓)주민을 위해 보낸 곡물을 북한군이 강제로 탈취한 사건이 발생했다.또 WFP대표단이 병원을 방문했을 때 누워있던 노인환자가 대표단이 떠난 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병원을 나서는 일도 목격됐다고 한다.지난 95년 우리가 지원한 15만의 쌀이 군부대에 공급됐다는 귀순자의 증언도 있었다. 결국 북한은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주는 손길들을 이런 식으로 배반하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우리가 북한의 굶주림을 대규모로 도와주고 싶은데도 주춤거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주민들은 생존조차 어려운 굶주림 속에 놓여 있는데도 전쟁준비만은 철저하게 해온 곳이 북한이다.군사비용의 극히 일부만 전용한다해도 북한은 최소한 주민을 굶게는 하지 않을 수 있다.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지만 쓰러져 가고 있는 주민들은 우선 살려놓고 봐야 한다는 순수한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우리도,국제사회도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려하던 대로 이마저 군대를 위해 빼앗아 간다면 도와주는 입장에서도 무슨 명목으로 더 도울 수 있겠는가.사실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에 처해 있다지만 군대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접을 잘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런데 주민의 최소한의 생존을 돕기 위해 보낸 구호품까지 결국은 북한군 수중으로 들어간다면 이는 사회적 강자가 무력을 앞세워 약자의 생존권마저 강탈,착취하는 것이다.과연 그런 체제가 존립할 가치가 있는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구호식량이 필요한 사람들 손에 제대로 전달되는지 철저한 감시가 요구된다.또 어린이.노인.장애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우선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면밀한 계획을 짜야 한다.국제기구는 우선 이번 사건에 대한 해명과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현재는 평양에 국제적십자연맹 대표단 2명 정도가 머무르고 있는데 이 숫자로는 어림없다.앞으로 구호물량의 증가와 비례한 감시단의 증가도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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