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 올해 이창호와 호각세 국내 4관왕 등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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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는 해'조훈현9단이 다시 중천으로 회귀하고 있다.'무관(無冠)'의 벼랑에 몰린지 1년여만에 눈부신 속력으로 부활하고 있는 조훈현의 괴력에 바둑계는 경악을 금치못하고 있다.

曺9단은 지난 8일 2대2 상태에서 맞이한 제4기 SK텔레콤배 배달왕기전 도전5번기 최종국에서 타이틀보유자 이창호9단을 불계로 제압하고 타이틀을 추가했다.패왕.비씨카드배.KBS바둑왕에 이어 국내 4관왕.얼마전 세계대회인 동양증권배에서도 우승했으니 올해의 전적만 따진다면 그는 당당 국내1위요 세계1위다.

曺9단은 지난 93년부터 94년초까지 제자 이창호9단에게 국내 전기전에서 일패도지해'대왕'하나만 남기고 모든 타이틀을 잃었다.曺9단은 그러나 94년에 세계대회를 모조리 석권,상금면에서 李9단을 더블스코어차로 누르고 그해 최우수기사에 올랐다.

이 미묘한 결과를 놓고 해석은 둘로 나뉘었다.曺9단이 이창호에겐 약해도 세계바둑계에선 여전히 호랑이라는 천적론(天敵論)과 조훈현의 승리는 마지막을 아쉬워하는 회광반조(回光反照)의 현상일 뿐 무적 이창호 앞에서 지는 해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운명론이 그것이었다.사람들은 자연의 법칙에 비중을 두었다.

조훈현은 체력의 한계에 고통받는 40대.그보다 스물세살 어린 이창호는 이미 바둑의 묘리를 통달한 절정의 고수이니 曺9단이 李9단에게 밀려나는 것은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미는 것처럼 자연스럽지 않겠느냐는 얘기였다.

과연 曺9단은 95년도에 무관으로 전락했고 세계대회에서도 참패를 면치못했다.한데 96년에 曺9단이 기왕.패왕.비씨카드배에서 우승했다.바둑계는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曺9단이 강해졌다기보다 李9단이 목표를 세계대회로 바꿨다는 해석이 좀더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졌다.97년에 들어와 曺9단은 李9단과 세차례 싸웠다.처음은 2월의 최고위전인데 曺9단은 2대3으로 패퇴했으며 4월의 KBS바둑왕전에선 曺9단이 2대1로 이겼다.그리고 이번의 배달왕기전에선 1대2로 밀렸다가 3대2로 역전승을 거뒀다.올해 曺9단과 李9단의 전적은 7승7패로 똑같다.지금까지는 87승122패로 曺9단이 크게 밀렸으나 올해는 박빙의 승부를 보여주고 있다.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차이가 벌어져야 할텐데,그게 자연의 섭리인데 왜 차이가 좁혀지는 것일까.“담배를 끊은 뒤 밤8시만 되면 머리에 안개가 끼던 현상이 사라졌다”고 曺9단은 고백한다.두뇌의 지구력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이창호에 대한 적응력이 좋아진 탓이 아닐까”라고 양재호9단은 해석한다.曺9단의 강세가 계속 이어지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曺9단은 그러나 밀려난 강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승부세계의 통설을 무너뜨리며 최강 이창호의 심장부까지 접근했다.천재의 저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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