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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산업화, 더 미룰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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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아사(餓死) 직전의 한국 의료를 되살리기 위한 다양한 해법이 제시되는 가운데 의료 산업화에 가장 큰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의료 선진국들은 수십년 전부터 의료 산업화를 도입했고 발 빠른 몇몇 아시아 국가도 수년 전부터 미래의 주요 산업으로 설정하고 정부가 직접 나서고 있다.

이처럼 다른 나라들은 이미 달리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 출발선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의료를 시장경제적 논리보다 복지적 논리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를 복지로 보는 시각은 분명 타당성이 있으나 여기에는 커다란 함정이 있다. 복지에만 안주하다 보면 새로운 치료법과 의료장비 개발 등 바이오 생명공학 분야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환자들은 해외에서 개발된 최신 치료를 받기 위해 더 비싼 진료비를 내야 하고, 국가적으로도 비용과 기술의 종속 정도가 심화할 것이다.

바이오 생명공학이 21세기의 주요 산업이자 인류의 염원인 건강과 국부를 동시에 가져다줄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여기에는 제약 산업, 의료기기 산업, 첨단진단기술 산업, 인간 유전체를 이용한 신치료 산업 등 새로운 패러다임의 미래 산업이 망라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의료의 핵심인 병원이 있다.

따라서 의료가 산업화란 과정을 통해 발전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우리 의료가 무한경쟁의 대열에 나서려면 몇 가지 개선을 통해 체질을 강화해야 한다.

첫째, 민간의료 발전을 전제로 하는 공공의료의 확충이 필요하다. 병상 수를 기준으로 볼 때 국가 책임의 공공의료 비율은 영국 95%, 프랑스 65%, 미국 34% 정도며 우리와 비슷한 체계를 가진 일본도 36% 수준인데 비해 한국은 15%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공공의료 비율이 최소 30%는 돼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공공의료 확충은 그 비율만큼 민간의료 부문의 도산을 불러오고 결국 전체 의료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공공의료는 민간이 담당했던 농어촌 의료, 특수질환 등 이른바 취약 분야를 흡수해야 한다. 이를 통해 보험재정도 살리고 의료 경쟁력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민간의료의 현실적인 지원을 위해 영리법인을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영리법인은 외부로부터 의료의 재투자를 위한 자본비용 조달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영리법인 허용에는 기부의 활성화가 전제돼야 한다. 이를 위해 사회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일반인 및 기업체들에 기부금에 대한 보다 폭넓은 세제상의 지원을 해주는 것도 현실성 있고 바람직한 대안이 될 것이다. 병원 운영의 많은 부분을 기부금으로 충당하는 세계 초일류 의료기관의 운영방식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델인 셈이다.

셋째, 우리 여건에 맞는 보충적 사보험제가 도입돼야 한다. 현재의 공공보험에 대칭되는, 즉 완전한 사보험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시기상조로 생각된다. 우리의 건강보험은 소득 수준에 비례해 지불하고 있는데, 대칭적 개념의 사보험이 도입되면 소득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우선 빠져나갈 것이다. 이는 건강보험 재정 악화를 초래해 결국 파산에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공공의료 보험 토대 위에 공인된 신치료법이나 진단기법 등 이른바 비급여 항목을 사보험으로 도입.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질 높은 진료에 대한 환자들의 요구도 들어주고 신치료법도 원활히 도입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의료의 산업화. 이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외국은 이미 뛰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21세기 국가 발전과 국민건강 백년 대계를 위해 정부와 의료계가 허심탄회한 자세로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종철 삼성서울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