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칼럼>비대가성 뇌물의 범죄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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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른바 정태수(鄭泰守)리스트에 오른 정치인들에 대한 소환조사가 거의 마무리되었다.새삼 놀랄 것도 없지만 소환된 인사들을 보면 우리 정부의 관료와 정치인들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한눈에 드러난다.

소환된 인사중에는 전직 경제담당 부총리가 두명이고,장관을 지낸 사람은 10명 가까이 된다.집권당인 신한국당 대표를 지낸 사람이 1명,사무총장을 지낸 사람이 3명이나 된다.집권당의 실세인 민주계 의원들은 거의 모두 받았다.거기에는 현직 국회의장도 포함되어 있다.정치자금,선거자금 또는 아무 명목도 없이 수억원,수천만원씩 받고 있다.

야당의원들은 주로 입막음 대상이었다.국정감사 때,국회 상임위가 열릴 때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대가로 또는 자료 요구라는 이름의 '공식적인 공갈'을 무마하는 비용으로 돈이 건네졌다.여도,야도,정부도,청와대도 예외가 없었다.

이게 한보(韓寶)라는 1개 기업의 로비 대상이었다.거기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명단도 있다고 한다.대선(大選)자금이 그중의 큰 부분일 것이다.그러니 만약 드러나지 않은 다른 기업들의 로비 대상과 대선자금까지 모두 치면 어떨 것인지

가위 짐작이 간다.총체적 부패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청문회장에서 수억원을 받은 한 야당 실세가“내가 받은 돈은 정치자금”“떳떳하고 당당하다”며 오만방자한 발언을 서슴지 않은 배경에는 암묵적으로 누군들 안 먹은 자가 있느냐는 총체적 부패에 대한 비아냥 같은게 깔려 있는 것 같다.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번 사건에 가장 많이 연루된 신한국당 실세들의'통빡'을 번연히 알 것이니 말이다.그들도 얼마전까지는 함께 군부정권의 부패를 비판하던 야당 동료였으니 말이다.

야당도 할 말이 없다.총재의 최측근이 수억원을 총재에게 한마디 보고없이 멋대로 받아 처리해버리는 풍토라면 그들 역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우리는 결국 부패로 막을 내린 군부정권들처럼 과거 민주화라는 깃발 아래 투쟁해 온 야당들마저 썩기는 마찬가지라는 서글픈 현실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야의원들은 정치인들이 검찰의 수사를 받는 것으로

인해 정치권이 위기에 빠진 것처럼 난리법석이다.대쪽같다던 여당 대표까지

조기매듭으로 수습해야 한다는 것이고,누구는 입법부의 수장이기 때문에

조사 못 받겠다고 뻗댄다.여야가 공멸(共滅)할 위기라고 한다.그러나 그것이 바로 청산되어야 할

구정치(舊政治)며 공멸해야 할 정치행태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검찰에 대해서도 항변한다.어떤 때는 수천만원의 뇌물도 대가성이

없다는 이유로 또는 단순히 떡값이라는 이유로 묻어두더니 이번에는 왜

문제삼느냐는 것이다.거기에 대해서는 검찰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번 수사를 흐지부지 덮어두고 돈 먹은 정치인에 대한

처벌을 면제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오히려 차제에 검찰이 정치자금에

대한 엄밀한 기준을 확립해 법적으로 대처할 명분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만약 이번에 다시

검찰이 수십명을 조사하고도 면죄부를 주거나,비대가성 떡값으로 일부만

선별처벌하고 넘어가 버린다면 그것은 정치권의 부패를 방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 기회에 적어도 비대가성 뇌물의 범죄성에 대한 엄밀한 기준이

마련되어야 하고 거기에 따라 뇌물받은 정치인들은 모두 사법처리되어야

한다.반드시 구속이 아니고 형사소추가 아니더라도 액수의 다과나 죄질의

행태를 가려 어떤 방식으로든

법적으로 처리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과상자에 넣어주었건,후원회비로 슬쩍 밀어넣었건,많건 적건간에 그것은

뇌물이다.비록 당장의 대가는 없더라도 미래의 대가를 겨냥한 예비적 뇌물인

셈이다.이에 대한 법적 처리없이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부패청산은

불가능하다.정치의 부패가 모든 부패의 연계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준을 정하면서 동시에 정치자금법에 대한 현실적인 개정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번 가을에 또 한번의

탈법적 대선을 치러야 할 것이며,다음 대통령도 재임기간 내내 대선자금

공개요구에 시달리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정치야말로 빅뱅이 필요한 시점이다.그것은 정태수리스트에 오른

정치인의 전면적인 사법처리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김영배 (뉴미디어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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