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달라진 訪美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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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오래전 필자가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얘기다.한.미간 통상마찰이 당시의 관심사였고 여야 의원들로 구성된 사절단이 자주 미의회를 찾았다.그때 우리 정치인들이 미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당간의 입장차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듣는

이들을 혼돈스럽게 만들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세월이 흘러 요즘 워싱턴을 찾는 우리 정치인들의 활동을 보며 자못 흡족할 때가 있다.

김대중(金大中)국민회의총재의 방미는 올해말 대선을 앞둔 정치활동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金총재는 남북문제와 한.미관계및 한국경제 상황을 얘기의 주제로 잡았고 때늦은 감은 있지만 미국인들이 듣고 싶어하던 말을 남겼다.

한마디로 인도적 차원의 대북(對北)지원과 연착륙을 지향하는 합리적인 대북 접근을 주장했다.그리고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미국의 역할도 부각시켰다.金총재를 잘 아는 미국인들이 오히려 전달되는 메시지에 참신함이 부족하다고 지적할 정도

로 논리에 무리가 없었다.그만큼 우리를 보는 미국인들은 '감정이 앞서는 한국인''예측못할 한국'의 이미지에 너무 익숙해진 것이다.

그러나 야당총재의 입을 떠난 말 속에 한국 지도층인사들의 생각이 차분히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 방미활동이었기에 분명 의미를 둘 만했다.

며칠 간격을 두고 한승수(韓昇洙) 전경제부총리가 뉴욕과 워싱턴을 찾았다.

한국경제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경제가 정치논리에 의해 흔들리고 한국언론에선 기회만 있으면 경제위기론을 부추기는 마당인지라 우리의 현실을 균형있게 전하는 노력이 절실할 때 이뤄진

적절한 인사의 방문이다.

대사 시절 각계각층 인사들을 두루 만나 의욕적인 외교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韓전부총리의 이번 방미일정을 보면 우리가 이 정도의 활동을 평소에 할 수 있다면 한.미 공조를 애써 강조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는 어려운 경제사정을 바깥에 알리는 한편 우리경제의 저력을 함께 납득시키는 어려운 과제를 전직 부총리에게 안겨주었다.하지만 국내정치로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우리정부가 자칫 소홀히 넘기기 쉬운 국가홍보에까지 생각이 미쳤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부총리를 지낸 현 집권당 의원과 무게있는 야당총재의 방미를 통해 한국의 여야 인사들이 미국인을 상대로 같은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이다.

머지않아 이곳을 찾게 될 또다른 대선주자들도 국가홍보에 있어'후속타'를 날려주길 기대한다.

<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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