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37년 가꿔온 난, 모두에 보여주고 싶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고고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가 있는 난(蘭)과 37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워 온 난이 곁에 있었기에 제가 오늘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난을 제주의 재산이자 모두의 자원으로 돌려주고 싶습니다."

1960년대부터 해운사업을 해 와 제주에선 '선박왕'으로 불리는 ㈜대양해운의 고유진(77)회장. 그는 제주시 화북2동 속칭 '웃거리' 마을에 산다. 가족이 사는 집은 제주시 도심에 있지만 그는 올해 초부터 자신이 손수 가꾼 5000여평의 '제주난원'에서 살고 있다.

천연기념물 191호인 제주 한란(寒蘭) 2만본과 대만산 난인 관음소심(觀音素心) 1만본, 춘란 5000본 등 모두 3만5000본이 그가 매일 만나는 자식들이다. 온실도 아홉채나 된다. 그는 우연히 난을 알게 됐다. 67년 초여름 그는 제주 한란 50본을 떠돌이 장사꾼에게서 본당 30원을 주고 샀다.

"돌을 맞은 막내 아들에게 기념이 될 만한 것을 키워보자며 구입했습니다. 귀한 걸 구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게 귀한 줄은 몰랐죠." 그해 7월 한란은 천연기념물이 됐다.

정신없이 바쁜 뱃일로 몸이 피곤했지만 그는 집 한쪽을 차지한 난을 키우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기온.습도 등 인간이 좋아하는 조건을 맞추면 한란은 '고맙다'며 잘 자라줬던 것이다.

그렇게 키운 난은 해가 갈수록 그 수가 불어났다. 지금껏 네차례 이사할 동안 새집을 구하면서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이 한란이 살 수 있는 조건이었다. 80년대 중반엔 5층이던 그의 회사 빌딩 한개층이 난으로 채워졌다. 2001년 그는 이 난들을 지금의 '제주난원'으로 옮겼다.

지난해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고회장은 "난을 분양하라는 요청도 많았지만 '내 아이들을 어떻게 돈받고 파느냐'며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는 10월부터 이곳을 시민에게 무료로 공개한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어엿한 '제주의 향기'를 선보이고 싶어서다. 한란이 한창 꽃을 피우던 지난 겨울 일본의 한란동호회가 이곳을 찾아 감탄사를 연발했다.

고 회장은 "난으로부터 모자람이나 넘침이 없는 인내를 배웠기에 40여년의 사업도 순탄했다"고 말했다.

제주=양성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