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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로운 프랑스 미디어 개혁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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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프랑스는 이웃 나라에 비해 언론을 ‘정치 상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나라다. 대혁명과 68혁명 등 정치적 격변에서 언론이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했던 경험 때문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분석이다. 그런 탓인지 프랑스 신문들은 아직도 정치색이 매우 강하고 이를 견제하는 장치도 많다. 신문의 공동 판매 조직 운영이라든가, 다매체 경영에 제약이 있는 것이 이런 예에 속한다. 한 언론이 지나치게 커지면 정치적인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런데 사르코지는 달랐다. 언론은 정치 도구가 아닌 산업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서를 기업 담당에게 맡긴 것이 이를 말해준다. 한마디로 사르코지의 미디어 개혁은 철저하게 국제 경쟁력을 갖춘 산업 육성의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보고서의 핵심은 ‘대형 미디어 그룹’의 필요성이고, 그 전제는 세계적인 미디어 융합 현상이다. 다양한 언론매체가 하나의 그룹으로 몰려 통합되는 과정은 필연적이라는 설명이다. 프랑스라는 나라 혼자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고 해도 매체의 집중화와 이를 통한 거대 미디어 그룹으로의 재편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이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챔피언 미디어 그룹’이 나올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TV와 신문, 라디오 등을 겸영할 수 있도록 규제를 푸는 작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른바 신문·방송 겸영 허용이다.

제1야당인 사회당은 사르코지의 언론 개혁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대통령이 공영방송 사장 임명권을 갖겠다는 주장 등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러나 신문·방송 겸영이나 대형 미디어 그룹의 육성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야당 역시 그 취지가 국내 정치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경쟁력 확보 차원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럴 만한 것이 미디어 그룹 육성을 주장하는 이 보고서가 사르코지의 정치 참모 혼자 임의로 작성한 문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직 언론사 사장과 임원, 기자는 물론 언론 노조, 법률·언론·경제 학자 등의 의견을 두루 귀담아들은 뒤 종합했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에서 주요 이슈마다 등장하는 좌파 정책이냐, 우파 정책이냐 하는 이념 시비도 일어날 일이 없다.

이처럼 프랑스에서 여야 혹은 좌우 할 것 없이 미디어 그룹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이유는 세계 문화 전쟁의 현실 때문이다. 문화 콘텐트 싸움이 21세기에 가장 큰 경제력 다툼이 될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미디어는 자체로도 중요 산업이지만, 이를 기반으로 한 각종 문화 콘텐트 산업의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 문화 전쟁을 이끌어가는 건 정부가 아니라 각국을 대표하는 미디어 그룹이다. 프랑스 정치인이나 학자·언론인 모두 프랑스가 이미 그 싸움에서 상당히 처져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를 서두르려는 데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한 프랑스 언론인에게 여론 독점 우려가 왜 나오지 않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인터넷이 있었다면 히틀러 독재도 없었을 것”이라는 소설가 르 클레지오의 말을 인용했다.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수십억 네티즌이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세상인데 한 나라의 신문과 방송이 합쳐진다고 과연 여론 독점이라는 게 가능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정치권도 언론을 정치도구로만 보고 싸울 게 아니라 국가 경쟁력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신문·방송 겸영 문제에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진배 파리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