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김현철 재수사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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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며칠전 출근길에 뉴스를 들으며 미국은 참 살맛나는 나라구나 하고 느낀 적이 있다.내용인즉 미 연방수사국(FBI)이“백악관내에 보고채널이 잘못돼 있다”는 대통령을 반박하는 공식성명을 냈다는 것이었다.중국정부의 미국내 정치자금제공 시

도를 FBI가 추적하고 있었는데,이를 빌 클린턴 대통령이 보고받지 못했다고 불평하자 FBI가 즉각 반격했다는 것이다.

그보다 앞에 나온 뉴스가 김현철(金賢哲)씨의 청문회 출석문제,YTN간부 인사개입 통화테이프 공개시비 등이어서 극히 대조적이었다.정부의 한 기관이 국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내 심기를 건드린다는 게 우리

나라에서는 상상이나 할 법한 일인가.

동시에 대검 중앙수사부 초대부장인 이종남(李種南)전법무장관의 얼굴이 떠올랐다.81년 중수부를 창설하면서“한국의 FBI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설명하는 모습이었다.그러나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대검 중수부는 한국의

FBI는 고사하고 권력의 시녀라는 지탄과 함께 온 국민을 불신의 늪으로 빠뜨리며 화병 드는 일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하다.

한 중소기업인이'마피아의 총대로 만든 잣대'란 신문광고를 내더니 시민단체는'검찰을 개혁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개혁할 수 없습니다'란 제목으로 잇따라 광고를 실었고,국민들은 박수를 치고 있다.공권력의 상징인 검찰이 동네북이 된 것이

다.

3류 드라마나 코미디 같은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朴慶植)씨의 비디오 테이프 녹화사건도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검찰탓이다.당초에 김현철씨 수사를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지난번 수사에서 검찰이 한보비리를 제대로 파헤치고 金씨 의혹을 남김없이 밝혀냈다면 비난광고도 안 나왔을 것이다.또 국민들이 朴씨가 몰래 녹화한 테이프 내용에 별 흥미를 갖지도 않았을 것이며,자연 朴씨의 비디오 테이프도 무용지물(無

用之物)이 됐을 것이다.아울러 많은 의사들이 환자항의에 시달리거나 잘 나가던 시민운동단체가 때아닌 도덕성 시비에 휘말리는 해프닝도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朴씨사건 이후 일반 시민들이 믿음을 잃고 불안감에 시달리는 소위'박경식 신드롬'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가깝게 지내온 친구나 이웃이 언제 나를 등지고 뒤통수를 때릴지 모른다는 괜한 의심이 들어 스스로 깜짝깜짝 놀란다는 독자

도 있었다.또 어떤 친구는 낯선 장소에 가면 자신도 모르게 천장에 CCTV 카메라가 있는지 두리번거리게 됐다고 했다.식탁위의 꽃바구니나 전화기에 도청장치가 붙어있을 것만 같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었고,심지어 전화통화하다

잡음이 섞이거나 소리만 조금 작아져도 감청(監聽).도청(盜聽)되는가 싶어 말조심하게 됐다는 것이다.

검찰이 한 사건의 수사를 잘못하는 바람에 온 나라가 시끄럽고 모든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김현철씨 의혹부분 재수사가 대검 중수부에 의해 슬그머니 다시 시작되고 있다.

재수사라는 것은 검찰로서는 치욕적인 불명예다.그런데도 문민정부 들어 12.12및 5.18사건을 여론에 밀려 재수사하더니 이번에도 같은 전철(前轍)을 밟고 있다.어쩌다 자존심 강한 우리 검찰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혹시 재수사 불감

증(不感症)에 걸린 것이나 아닌지 안타깝다.

이제라도 검찰은 국민들에게 재수사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당시 수사책임자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 등 반성하는 자세와 각오를 보여줘야 한다.검찰이 직접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법무부장관이 나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번에는 국민들이 느끼고 있는 모든 의혹을 제대로 풀어주지 않으면 안된다.그리고 무엇보다 검찰은 이번 재수사를 국민들을 살맛나게 해줄 용기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명예를 회복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권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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