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터뷰>독일 좌파지식인 한스 외르크 잔트퀼러 브레멘大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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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독일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그들의 언어와 이론을 일거에 무용지물로 만들었기 때문.쇠퇴일로에 있는 이들 가운데서도 날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한스 외르크 잔트퀼러 교수(브레멘대.58)가 지

난 2일 저녁 일본을 거쳐 조용히 한국땅을 밟았다가 5일 출국했다.한국인 제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이화여대.고려대 강연 외에 어떤 공식적 활동도 거절한 그를 본지가 단독 인터뷰했다.하루 10시간씩 공부한다는 그는 독일 좌파 이론가론

드물게 모든 사태에 나름의 논리로 대응하는등 지적인 면모를 보이면서도 인간에 대한 도덕적 신뢰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성찰을 놓치지 않는 온화한 인품이었다.최근 그가 주창하는'지식 민주주의'로부터 얘기를 풀어나갔다.

-'지식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앎의 인권에 기초한 지식의 합리적 질서다.지식이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체계이자 세계상이다.근대사회란 바로 지식을 근거로 한 사회다.정치적 지배도 바로 이같은 지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그러나 그것이 모든 개인

과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방향으로 전개돼왔다.따라서 이제 자기세계를 해석하는데 대한 동등한 권리,즉'지식 민주주의'는 매우 중요하다.특히 정보화사회에서는 지식의 민주적 교환이 매우 중요하다.”

-아직 정치.경제적 인권을 확보하지 못한 경우도 많지 않은가.

“민주주의의 척도는 국민들이 자신의 인권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정치적 참여가 허용되느냐에 있다.정치.경제적 인권에만 주목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인권이 통합돼있다.이제는 주거.노동.정보에 대한 권리가 정치.경

제적 권리만큼이나 중요하다.”

-지식의 억압적 성격이 현재 주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양면적 성격을 갖는다.세계에 대한 유일한 해석을 강요한 근대적 지식을 비판하고 다원주의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탈근대론은 긍정적이다.지배적이고 억압적 지식은 비판돼야 한다.그러나 탈근대론은 하나의 공동체 개념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부정

적이다.전지구적 문제해결에서 합리성.지식.과학은 여전히 중요한 관건이다.탈근대론자들은 근대가 끝났다고 하지만 앎의 인권에 기초한 주체성의 시대는 이제서야 시작됐다.”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와 당신의 이론은 어떻게 다른가.

“물론 지금도 나는 철학과 경험적 분석을 결합한 마르크스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그렇지만 19세기의 마르크스 변증법과 정치경제학.마르크스주의는 이젠 좌파의 이념적 토대가 될 수 없다.나는 자유의지.인권.개인의 자율성에 기초한

앎의 인권이 정치의 새로운 토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좌파적 전망은?

“지식인의 특권적 지위가 민중의 희생위에 서있다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따라서 지식인은'정의의 원칙'을 삶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빈자는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식에서도 빈곤하다.따라서 빈자와 부자 사이의 정치.경제적 정의뿐만 아니

라 지식의 정의도 중요하다.이를 통해 전세계 공통의 지적 토대를 마련해 나가야 한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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