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시대>8.딸딸이 아빠가 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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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후남이.끝순이.말녀.말자….

이런 이름들이 생활 주변에서 자취를 감춘지 이미 오래.하지만 이들 이름속에 내포된 남아선호사상은 끈질기게 우리의 의식 언저리에 살아남아 있다.“대가 끊어지니까”“제사 모실 후손은 있어야지”“늙어서 누굴 믿고 사나”.배웠든 못배웠든

,있는 집이든 없는 집이든 아들에 집착하는 이유는 하나같았다.

한국사람들의 그 뿌리깊은'아들병'이 서서히 치유될 조짐을 보인다고 말하면 아직까지 동의보다 부정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나이 40이 넘어 아들 하나 바라고 늦둥이를 낳는 용감무쌍한(?)중년들의 행진이나,오로지 딸이라는 이유로 엄마

뱃속에서 죽어가는 무수한 태아들의 비극을 떠올리면 그럴만도 하다.그러나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하는 법.극심한 사회 변화와 그에따라 몰라보게 달라진 생활패턴은 좀처럼 무너질 것같지 않던'아들제일주의'까지 뒤흔들고 있다.

“아들이 꼭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69.9%의 여성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는게 기.미혼여성 1천명을 대상으로 한 ㈜태평양 사외보'향장'의 최근 조사결과다.특히 이런 의식은 나이가 젊을수록 두드러져 95년 본사 여론조사팀

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30대 아내의 19.4%,30대 남편의 26.7%만이“아들을 반드시 낳고 싶다”고 응답했다.

젊은 부모들이 이처럼 딸.아들에 구애받지 않게된 가장 큰 원인은 더이상'아들자식=노후대책'이 아니라는 현실인식 때문이다.20~30대 부부중 늙어서 아들.며느리의 부양을 받으며 살리라는 기대를 갖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노인문제연구소 朴재간소장은“오히려 무뚝뚝한 아들보다 마음 통하는 딸과 함께 살거나 가까이 살며 정서적 유대를 나누는 노인들이 늘어나는게 요즘의 추세”라고 진단한다.실제로 이 연구소가 지난해 전국 노인 1천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딸부부와 일시.영구적으로 동거하는 사람이 5.7%나 됐으며 노부부 혹은 노인단독세대인 53.1%도 결혼한 딸과 가까이 지낸다고 말했다는 것.朴소장은“노인대학에 가보면 서로 '딸이 몇명이냐'고 물어볼 만큼 딸 가진 노인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뒤바뀐 세태를 전한다.

노후에 편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상대로서 뿐만 아니라 딸은 어릴 때부터 아들에 비해 키우는 재미를 톡톡히 준다는 점에서도 주가(?)를 높이고 있다.어차피 노후를 기댈 것도 아니고,죽은 뒤 제사보다 생전의 효도가 더 낫다는 점을 생각하면'딸딸이'아빠인 것이 지극히 만족스럽다는게 金영호(39.회사원.경기도고양시일산2동)씨의 생각이기도 하다.“지난 밸런타인데이 아침에 11,9세된 두 딸이 알록달록 포장한 초콜릿과 함께 편지를 내밀었습니다.'아빠,우리 때문에

너무 고생하시죠'라는 글을 읽는 순간 코끝이 찡하더라고요.”金씨는“아들 가진 아빠가 이런 기분 알겠냐”고 자랑이 한창이다.

한편으론 최근들어 가시화된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진출 역시 딸.아들 차별을 없애는데 큰 몫을 했다는 해석도 나온다.더이상“딸 잘 키우면 뭐하나.결국 남의 아들 뒷바라지나 할텐데…”라는 자조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인 것이다.

남편과 똑같이 직업을 갖고 돈버는 아내가 친정 부모에게 시부모와 마찬가지로 당당하게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역시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딸 자식에게서 용돈을 받고 효도여행 선물을 받는 일은 더이상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지난해 가을 결혼한 李미영(27.은행원.서울성동구행당동)씨는 미혼시절 부모님께 생활비로 드리던 월급의 일부를 결혼 이후에도 계속 드리는 경우.李씨는“부모님의 형편이 어려운 탓도 있지만 내가 지금 돈을 벌 수 있게 된게 다 부모님이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니 당연하다”고 말한다.남편 역시 그런 李씨의 생각을 존중해 주고 있다.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황은자씨는“미래에는 자녀만이 중요할 뿐 아들이건 딸이건 성에 따른 의미는 줄어들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시대가 달라지고 있는 만큼 호주제등 남녀차별의식을 조장하는 사회제도는 하루빨리 고쳐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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