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장산곶매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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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곶매 이야기
백기완 지음, 노나메기
첫권 420쪽 둘째권 476쪽, 각권 1만5000원

백기완(71)씨가 입을 열면 이야기 꾸러미가 굽이굽이 끝을 모른다. 1987년 흰 머리를 날리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사자후를 토하던 민중대통령 후보 백씨는 걸차면서도 구수한 입담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다. 요즈음도 그가 이끄는 서울 명륜동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은 손님은 잠깐 마루에 붙인 엉덩이가 한없이 무거워질만큼 귀를 붙잡는 그의 말솜씨에 홀딱 빠지게 된다. 그는 최근 펴낸 『장산곶매 이야기』에서 어머니로부터 이야기꾼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털어놨다.

“‘동치미만 먹었더니 속 쓰려 죽겠구나 이거’, 이렇게 보챌 것이면 삯바느질을 하시던 우리 어머니는 ‘기완아, 밥보다 더 배가 부르는 제너미(이야기)인데 한술(한번) 들어볼래?’ 그러시면서 마치 차가운 얼음 속을 흘러가는 똘물처럼 돌돌 구르는 장산곶매 이야기를….”

장산곶매는 깎아지른 벼랑의 막판에 몰려서도 그 죽음의 땅에서 물러서지 않고 착하고 의로운 일에 우뚝 나서는 한민족의 상징이다. 황해도 구월산 깊은 터에 살던 어매스러운(영특한) 매가 펼치는 구구절절 이야기는 장쾌한 민중사라 할 수 있다. 황석영씨가 대하소설 『장길산』 들머리를 장산곶매로부터 시작한 것도 이처럼 낮은 이들 편에 선 장수로서의 품이 큼직했기 때문이다.

백씨는 대여섯살 적부터 열세살까지 펑펑 울며 들은 장산곶매 이야기를 글로 옮기면서 한국 문학이 나아갈 길을 말한다. “제너미(이야기)는 ‘말 그대로’다. 목숨이 목숨이고자 해서 목숨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가 바로 제너미다. 요샛말로 하면 문학이라 이 말이다. 따라서 문학이란 목숨이 목숨이고자 해서는 목숨을 죽이려는 막심(폭력)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가 아니면 제너미(문학)가 아니라는 말이다. 살고자 몸부림치는 이의 마빡에 맺히는 땀방울과 이 삶터를 아름답게 꾸려가는 사람들의 등때기에 어리는 이슬이 꽈다당 하나 되어 거센 바다를 겨냥해 굽이치는 서사성이 있어야 제너미다.”

『장산곶매 이야기』를 읽는 또 하나 큰 즐거움은 백씨가 구성지게 풀어놓은 토박이말이다. 괄호 안에 설명을 달고 책 뒤에 우리말 풀이 사전을 따로 단 1500여 개 싱싱한 말대갈(낱말)이 외래어에 전 우리 입과 뇌를 뛰놀게 한다.

백씨는 “꼭 읽겠다고 하는 사람에게만 책을 보내고자 한다. 생각이 있으면 출판사(02-762-0017)로 알려주길 바란다”고 덧소리(머리말)에 썼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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