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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능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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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후보의 선거본부장은 커다란 실수를 뒤늦게 발견했다. 후보의 사진과 연설문을 담은 홍보 전단 300만 부를 배포하려던 참이었다.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진을 사용한 것이다. 저작권법에 따르면 전단 한 장당 1달러, 모두 300만 달러를 요구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요즘 화폐가치로 6000만 달러가 넘는 거금인 데다 전단을 다시 찍을 시간도 없었다. 고심하던 선거본부장은 저작권자에게 전보를 쳤다. “홍보 전단 300만 부에 사진을 실어 배포할 계획. 전국적으로 귀하를 알릴 수 있는 아주 멋진 기회. 귀하의 사진을 실어주는 대가로 얼마를 낼 용의가 있는지 즉시 답변 바람.” 곧바로 답신이 왔다. “기회를 준 것은 고맙지만 250달러밖에 낼 수 없음.”

요즘의 현실은 이보다 복잡하지만 협상에 재능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다.

2000년 가을, 유엔 주재 미국 대사 리처드 홀브룩은 숙제를 안고 있었다. 미국의 유엔 예산 분담금을 현행 25%에서 22%로 줄이라는 의회의 요구 때문이었다. 미국 대신 자국의 분담금을 늘려주겠다는 나라를 찾아내는 게 핵심 과제였지만 그런 나라는 없었다. 각국과 연쇄 접촉을 하던 홀브룩은 숨어 있는 걸림돌을 찾아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2001년도 예산이 이미 확정된 터라 증액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홀브룩은 2002년부터 증액해 달라고 요구하는 전략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시기라는 걸림돌을 해결하자 증액 문제의 협상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북한의 핵 개발을 둘러싼 6자회담에는 이런 묘안이 없을까.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12월 8일 중국 베이징에서 회담을 재개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미국과 중국·러시아는 한국과 일본이 덩달아 핵무장을 요구받는 상황을 포함해 걱정거리가 많다. 북한으로서도 핵무기를 끌어안은 채 헐벗고 굶주리는 게 합리적 선택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북한은 회담을 진척시키는 듯하다가 어깃장을 놓는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여기서 북핵 협상에 관여했던 정부 고위관계자의 분석이 생각난다. “북한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내부 합의를 끌어낼 능력이 없는 것 같다.” 사실이 그렇다면 6자회담은 루스벨트의 선거본부장도, 홀브룩 전 대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상대방이 협상을 타결시킬 능력 자체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니까.

조현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