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빨간 함지박으로 눈썰매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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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함박눈이 펑펑 내리더니 온세상이 눈이 부시게 하얗게 됐다.예년 같으면 대전 할머니댁에라도 갔을텐데 차가운 불경기 바람이 우리집까지 비집고 들어와 네식구가 온종일 이불속에서 연휴 첫날을 보냈다.
텔레비전에서 스키장과 눈썰매장을 오가는 차량행렬로 고속도로가주차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어휴,저 고생을 왜하나'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 남편과 아이들을 깨운 나는 눈구경을 가자고 제의했다.아이들은 신이 나서 지난해 세일때 7천원주고 산 바지를 꺼내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끼며 환호성을 질렀다.아침부터 누가 밟아 놓았는지,내린 눈이 적당히 단단해져서 미끄럼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큰 아이는 아빠 뒤에 쪼그리고 앉아 매달리고 작은 아이는 내뒤에 매달려 우리가 끌어주는대로 신나게 미끄럼을 탔다.가다가 엎어지고 넘어져도 아이들은 신이 나서 어쩔줄 몰라했다.
영화.러브 스토리'의 한장면처럼 뒤로 넘어지기도 하고,눈 위를 뒹굴기도 하고,눈을 집어 높이 뿌리기도 했다.
운동장에서 신나게 놀다 나와보니 동네 아이들이 집에서 가지고나온 함지박에 끈을 매달아 눈썰매를 타고 있었다.기막힌 아이디어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빨간 플라스틱 함지박에 아이를 태우고 앞에서 끌어주는 어떤 아빠의 모습속에서 가슴 한구석이 시린 듯한 정겨움을 느꼈다.아마도 서울에선 이런 흐뭇한 풍경을 찾아볼 수 없으리라.
아직 다 얼지 않은 개울 위로 작은애가 살금살금 걸어가다.빠지직'하고 얼음이 꺼지는 소리에 흠칫 놀라 아빠에게 매달리기도하고,나지막한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서 누구것이 더 긴가 키도 대어 보고….어느새 아이들의 콧등엔 차 가운 겨울바람에도 불구하고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시골에 묻혀살기에 아직껏 스키장엔 한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나름의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구나 생각해본다.
김정애〈경기도광주군송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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