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우리시대의 법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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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정의(正義)의 여신 디케는 바람둥이 제우스와 테미스 사이에서 태어난 세딸중 막내다.예로부터 석고상의 모델로 되어 있는 디케의 모습을 보면 한손엔 저울을,다른 한손엔 칼을 쥐고 있다.저울은 법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의 형평성을,칼은 법을 집행하는데 있어서의 엄격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그래서 디케의 여신상은 흔히 재판의 공정성과 바람직한 법관상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되곤 한다.
한데 묘하게도 이 여신상의 눈은 안대로 가려져 있다.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선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하지만 우스갯소리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판결에는 어차피 잘못이있을 수 있으므로 눈을 가리고 판결하는게 오히려 속편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가 하면,판결하는 일이 졸립고 피곤한 일이므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란 해석도 있다.
판사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될는지 기다려야 하는 피고인들에겐 판사가 하늘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판사도 법복을 벗고 법정을 나서면 역시 평범한 인간이다.그런 점에서는 디케 여신상의 안대에 대한 우스갯소리의 해석이 법관 의 진면목과더욱 가까울는지도 모른다.
건국 초기에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金炳魯)씨는 퇴임사에서“모든 사법종사자들에게 굶어죽는 것이 영광이란 말을 남기고 싶다.그것이 압력에 굴하고 부정을 저지르는 것보다는 훨씬 명예롭기때문이다”고 말했다.하지만 현실적으론 시원찮은 대우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것도 억울할텐데 굶어죽을 각오까지 해가면서 법관직을 지키라는 것은 가혹할법 하다.
서울고등법원이 소속판사 65명과 그 부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결과를 보면 그래도 대다수가 법의 마지막 보루로서 판사직에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봉급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만이고 건강유지방법으론.숙면'을 가장 많이 꼽았다고 한다.한 민간단체가 95년 여름 한달동안 재판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지법.고법의 민사부 판사중 40%이상이 재판중 졸았다니.잠과의 전쟁'도 문제인 것 같다.디케 여신상의 안대를부러워하는 법관들도 있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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