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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가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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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가방 하나 든 게 뭔 대수냐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가방은 안 들어도 되니 일이나 잘하라는 비아냥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대통령의 가방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자기 가방을 아랫사람에게 들리는 권위주의를 버린 건 기분 좋지만 사소한 일이다. 그보다는 문제를 내가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 표현에 무게를 두고 싶다. 적어도 가방 안에 든 일만큼은 꼭 이뤄내고 말겠다는 각오 말이다.

아마도 우리의 대통령은 세계 정상들 앞에서 국제 금융위기 해법을 제시하게 된 데 크게 고무된 듯하다. 스스로 평가했듯 “한국이 새로운 금융체제 변화를 꾀하는 세계 경제사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데 감격한 모양이다. 가방 안엔 그와 관련된 서류들이 가득했을 테고, 그래서 한순간도 남에게 맡길 수가 없었던 거다. 나는 그런 대통령의 조바심이 정당하다고 본다. 10년 전 외환위기와 달리 지금의 금융·실물위기는 우리만 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어서 그렇다. 선진국이건 신흥국이건 보호무역주의의 유혹에 흔들리기 쉬운 상황이니 그렇다. 자국의 경기 회복을 위해서라면 타국의 희생은 안중에도 없는 ‘근린 궁핍화 정책(beggar-my-neighbor policy)’들 말이다. 당장 우리만 해도 내년에 취임하는 미국의 새 대통령과 자유무역협정(FTA)재협상을 벌여야 할지 모른다. G20 의장단 자격으로 세계를 공멸로 이끌 그런 근시안적 무역장벽을 허물고 대안을 찾아내야 할 책무를 짊어졌으니 그렇다. 그래서 세계 13위 경제대국에 걸맞은 국제적 위상을 찾을 절호의 기회 앞에 섰으니 더욱 그렇다. 일 욕심 많은 대통령의 투지가 불타지 않을 수 없었을 테고 가방 쥔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을 일이다.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터다. 어쩌면 그들 생각대로 그저 ‘따라 하기’일 수도 있다. 가방 든 외국 지도자의 모습이 활동적으로 보인다는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더라도 의미가 바래진 않는다. ‘모션(motion·동작)’이 ‘이모션(emotion·감정)’을 좌우하는 까닭이다. 부러 젊게 행동하면 마음까지 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공부와 담 쌓은 학생이라도 매일 사전을 들고 다니다 보면 언제나 베개로만 쓰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만약 가방을 들라고 조언한 참모가 있었다면 모처럼 밥값을 했다.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런 조언을 할 수 있는 청와대 분위기라면 그건 정말 경축할 일이다.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그저 대통령이 오늘의 투지와 각오를 가방에 담아두고 변함없는 마음가짐으로 매사에 임했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낡은 가죽 가방이었다면 폼이 더 났겠지만 윤기 흐르는 새것이라도 괜찮다. 퇴임 때 경륜이 고스란히 담긴 낡은 가방을 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위 영공이 한밤에 부인과 함께 있는데 밖에서 수레 소리가 났다. 수레 임자는 대궐 앞에서 내려 조심스레 걸은 뒤 멀리서 다시 타고 지나갔다. 부인은 소리만 듣고도 그가 대부 거원임을 알았다. 공이 이유를 묻자 부인이 대답했다. “군자는 밝은 때라고 절의를 드러내 보이지 않고 어두운 때라고 행실을 태만하게 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소학』에 나오는 일화다. 그만큼 기본 돼야 할 마음가짐이 그렇다는 거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