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독립관 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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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갑신정변 실패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徐載弼)은 11년만인 1895년 12월 귀국했다.한해 전에 있었던 갑오경장으로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에 대해서도 사면령이 내려졌다.김홍집(金弘集)내각은 입각(入閣)을 권했으나,서 재필은 국민계몽이 더 시급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그리고 착수한 것이 신문발간이다.1896년 4월7일 독립신문이 태어났다.
독립신문 창간에 성공한 서재필은 계몽운동 확산을 위해 같은해7월2일 독립협회를 창설했다.초대회장은 안경수(安경壽)가 선출됐고,서재필은 고문이 됐다.독립협회는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을 본부로 삼아 독립관이라 이름붙였다.왕세자는 친히 한글로.
독립관'이라 쓴 현판을 내렸다.독립관은 독립협회 사무실이자 민중계몽을 위한 강연및 토론회 장소로 사용됐다.
모화관은 조선시대 중국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사대(事大)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태종 7년(1407)에 세워졌으며,처음엔모화루(慕華樓)라 불렀다.세종 11년(1429) 규모를 확장해모화관이라 개칭(改稱)했다.모화관 앞엔 영은문 (迎恩門)이 있었는데 중종때 세워진 것이다.중국에서 사신들이 오면 압록강변 의주(義州)에까지 원접사(遠接使)를 파견,영접했다.서울에 도착하면 모화관에 묵었는데,왕세자와 문무백관(百官)이 사신앞에 나가 재배(再拜)의 예를 갖춰야 했다 .
서재필은 독립관을 세울 가장 적당한 장소로 모화관을 택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뒤 모화관은 빈집이었다.서재필의 생각은 치욕의 장소였던 모화관을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바꾸는 것이었다.이와함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우는 한편 이 일대를 독립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1897년 11월20일 독립문은 완성됐으나 독립공원은 자금부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독립관은1908년 일제가 우리의 사법권을 장악한 뒤 경성(京城)감옥을세우면서 철거당했다.
지난 92년 8월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개장이래 지지부진했던독립관 복원사업이 드디어 외부공사를 마치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앞으로 내부공사를 거쳐 독립문 건립 1백년되는 내년 광복절 정식 개관될 예정이다.겨레의 선각자이자 시대의 풍운아였던 송재(松齋)선생의 애국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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