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진실왜곡 용어 '연좌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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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단어 또는 용어는 때론 진실을 은폐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특히 군사용어에 그런 게 많다.끔찍한 살상무기인 고엽제를.에이전트(Agent) 오렌지'라고 부르는 식이다.그럴 듯한 이름을붙여 놓으면 거부감이 좀 덜한 것도 사실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이와 유사한,그러나 방향은 정반대인 교묘한 용어만들기가 시도되고 있다.소위 .연좌제'문제다.여야는 사무장이나 회계책임자가 불법을 저지르면 해당후보의 당선을 무효로 하는 현행 선거법조항을.연좌제'라며 뜯어고쳤다.야당 은 한발 더나아가 15대 총선때 문제가 된 후보에까지 소급적용해 구제해야한다고 요구하고 있다.야당은 그것을 안 받아 주면 예산안을 통과시킬 수 없다고 버텼다.
“연좌제 자체가 위헌이니까 이와 관련해 재판에 계류중인 의원들도 구제해야 한다”는 게 야당측의 논리다.
언뜻 보기에는 그럴 듯하다.국회의원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돼서는 안된다는 국민감정도 적절히 자극해 공감대를확산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교묘한 논리의 함정이 있다.
사무장이나 회계책임자가 선거법을 어겼을 때 그 책임을 후보에게 묻는 것은 사실 연좌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선거때 사무장이나 회계책임자가 쓰는 돈이 결국 후보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심하게 얘기하면 서로 공동정범( 共同正犯)의관계다.“사무장과 회계책임자가 뿌린 돈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발뺌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얄팍한 말장난일 뿐이다. 이 경우는 연좌제가 아닌 후보공동책임제라고 하는 게 옳다. 그러나 여야는 이 법을 연좌제라는 오명을 덮어씌워 폐기해 버렸다.그러니 후보들은 이제 선거때 아무리 펑펑 돈을 써도아랫사람 핑계만 대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 셈이다.
야당측은 검찰이 이 조항을 야당만 표적으로 삼아 자의적으로 검찰권을 휘두르고 있다고 주장한다.“4.11총선 이후 검찰이 여당은 봐주고 야당만 죽였다”는 게 야당측의 하소연이다.
그러나 검찰의 공정성은 그 자체를 문제삼아야지,선거법 자체를후퇴시키겠다는 것은 억지논리다.
거기에다 15대때 문제가 된 의원을 구제해야 한다며 예산안통과까지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당리당략일 뿐이다. “법 만드는 것은 국회니까,칼자루는 의원들이 쥐었으니까,그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거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정치권은 알아야 한다.교묘한 용어만들기로 진실을 왜곡하려는 시도는 중지돼야 한다.
김종혁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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