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北 김경호씨 맏평형 경태씨 올2월 타계한 누이 영정찾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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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꿈에도 잊지 못하던 동생 경호가 돌아왔네.눈좀 떠 보소.”11일 오후 서울도봉구우이동 오봉정사.일가족을 이끌고 북한을 탈출한 김경호(金慶鎬.61)씨의 맏형 경태(慶太.70)씨를 비롯한 가족들은 경호씨의 누나 정순(貞順)씨의 위패 앞에서 오열했다. “경호를 찾겠다며 40여년을 그렇게 애썼는데,단 열달을참지 못해 먼저 가다니….” 정순씨의 오빠인 경태씨는“정순이는경호의 누나이자 어머니였다”며“경호와 헤어졌던 동네를 떠나지 않으며 처녀로 늙어갔다”고 눈물을 훔쳤다.
정순씨 일가는 43년 평남순천군운산면 고향을 떠나 서울 이태원에 터를 잡았다.그해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 돌아가신 뒤 3개월만에 중풍으로 아버지마저 운명을 달리했다.게다가 몇년뒤 오빠인 경태.경백(慶白.76년 사망)씨마저 지리산 공 비토벌에 동원돼 정순.경호 남매만 남게 됐다.
이때부터 나이는 비록 세살 차였지만 정순씨는 소녀가장 노릇을해야했다.이웃 무당집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굿판에 나온 음식을 얻어 동생을 먹여살렸다.
50년 전쟁이 터지고 서울 수복을 앞둔 어느날“노역간다”며 집을 나간 경호씨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당시 16세 밖에 안된 경호씨를 인민군이 전쟁터로 끌고간 것이었다.
휴전후 경태.경백씨는 이태원 집으로 찾아왔지만 경호씨는 끝내돌아오지 않았다.끌려간 것을 모르는 정순씨는 알만한 사람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동생의 행방을 수소문했다.혹시 시신이라도 찾을까 미친듯이 전쟁의 잿더미를 뒤지기도 했다.
다른 가족들이 하나씩 이태원을 떠날때도“모두 떠나면 경호가 어떻게 찾아오느냐”며 평생 옛집을 떠나지 않았고“동생을 잃은 내가 결혼하면 뭐하나.경호를 만날 때까지는 혼자살 것”이라며 결혼하지 않았다.
사채업을 하며 뒤늦게 모은 돈으로 암자를 찾아 수시로 동생의무사함을 빌기도 했다.입버릇처럼“제일 똑똑하고 얌전하던 동생이었는데…”라고 넋두리하곤 했다.몇년전부터 당뇨병에 시달리던 정순씨는 올 2월 급성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기전 병상에서 남긴 말은“경호가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숨진 뒤 재산을 정리하던 가족들은 유품을 보고 또 한번눈시울을 적셔야 했다.
남긴 것이라곤 간단한 세간살이와 경호씨의 빛바랜 사진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김기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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