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려의 "부령을 그리며" 번역.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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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연못에 붉은 연꽃 천만 송이 피었는데/연희가 그리워 보고 또 본다네/마음도 같고 생각도 같고 사랑 또한 같아서/한 줄기에 난 두 송이 연꽃 부럽지 않았거늘/하늘끝 땅끝에 산과 강이막혀 있어/허공 중에 그리운 노래 죽도록 불러보네 .” 요즘에야 연애시가 넘쳐 흐르지만 조선시대.뼈대있는'사대부가 연서를 띄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그러나 담정(庭) 김려(金려.1766~1821)를 아는가.사대부로서 누구보다 절절한 연시를 쓴조선 후기 작가.
그것도 신분이 한참 낮은 여성에게.그는 연암 박지원.다산 정약용과 같은 시대를 살다 갔다.7대조가 인목대비의 생부일 정도로 가풍있는 집안 출신.하지만 그에 대한 일반인의 면식은.제로'에 가깝다.연암.다산 같은 두드러진 문필활동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담정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감성과 직관의 시정(詩情)을 펼쳤다.그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농축한 연작시집.부령을그리며'(돌베개刊)가 인제대 박혜숙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그의 면모가 일반에 일목요연하게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부령은담정이 서학(西學)을 얘기한 죄목으로 유배에 올랐던 함경도 지역.앞의 시도 부령 기생 연희에게 보낸 연서다.
담정의 시에는 많은 여성들이 등장,파격적인 모습을 보인다.가장 큰 연정을 느꼈던 인물은 연희.담정은“빙설같은 영혼에 옥처럼 고운 자태/붉은 입술,하얀 이,새까만 눈썹”에 황홀해 한다.또한 연희는 선녀와 다름없었다.“앵무 같은 정신 에 나비 같은 영혼/연희는 연희는 하늘의 선녀건만 어찌하여 궁벽한 변방에묻혀 있나”고 아쉬워 한다.그는 연희와 관련된 물건을 보고 시심이 일어나는가 하면 언젠가 그를 따뜻하게 보살펴준 연희에게 은혜 갚을 날을 고대하기도 한다.현대 인 눈에는 다소 유치하지만 엄숙하기만 했던 양반문화를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이다.
또한 여성을 성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본 점이 탁월하다.18세기말 사대부 지식인의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는 진보적 시선이랄까.시인의 감수성이 현대의 페미니즘을 예견한 듯하다. 박교수는 담정이“군자와 소인.남성과 여성등 위계질서에 기초한 중세적 권위를 거부하고.만물은 평등하다'는 근대적 감수성을 선구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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