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모든 기업을 다 안고 갈 수만 있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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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금융쓰나미로 인해 지금 국내 경제상황은 외환위기 때를 방불케 한다. 이렇게 어려운 때 국가 지도자가 나서 고통받는 산업현장에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구체적인 부분까지 반복하면 일이 꼬일 수 있다.

며칠 전 만난 은행 간부 K씨는 “흑자도산 기업이 생겨나선 안 된다는 대통령의 발언 이후 은행들이 끙끙 앓고 있다”고 털어놨다. 거래 기업에 대출을 계속할지 말지는 자신들이 결정할 일인데, 여기에 대통령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덕분에 권위주의 정치는 거의 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청와대의 뜻을 ‘엄명’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사실 흑자도산이 없도록 하라는 말은 그리 잘못된 게 아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흑자도 내지 못하면서 은행에 손실을 끼칠 기업은 정리해도 좋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옥석을 가려 지원하라는 말인데 무조건 지원하라는 말로 전달되는 것이 문제다.

K씨는 “거래 기업이 다 어려우면 은행은 누가 뭐라 해도 회생 가능성이 큰 기업부터 지원하게 돼 있다”고 말했다. 모든 기업에 대줄 돈도 없거니와 그랬다가 일이 잘못되면 책임은 자신들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어느 신생 조선사가 자금난에 몰리면서 증시와 은행에 찬물을 끼얹은 적이 있다. 관련 업계에선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었다. 이미 분양이 안 되는 상황에서도 지방에 계속 아파트를 지어 문제를 악화시킨 건설사들의 영업도 이해하기 어렵다. 일부 기업은 한껏 부풀려진 장부상의 자산을 근거로 “일시적 유동성 부족을 겪고 있을 뿐”이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수긍할 전문가는 많지 않다. 기업컨설팅 전문가 이정조씨는 “나라 안팎의 여건이 이렇게 갑자기 나빠질 줄 몰랐다고 하겠지만 경영자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기업이 도산하면 오너는 물론 종업원도 직장을 잃게 된다. 가슴 아픈 일이다. 실직자가 늘어나면 사회 불안도 높아진다. 그렇다고 모든 기업을 다 품에 안고 갈 수는 없다. 그러다간 모두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털고 갈 기업은 털어야 한다는 말이다.

심상복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