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여만에 우정의 대결-한화 노장진.해태 이대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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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93년 3월14일.
빙그레와 해태의 시범경기에선 당시 고교야구 최대어로 인정받던두명의 고졸신인이 나란히 선발맞대결을 펼치며 프로무대에 첫발을내디뎠다.
공주고 출신의 노장진(한화)과 진흥고를 졸업한 이대진(해태). 그러나 그로부터 3년여.두 유망주의 야구인생이 이렇게 달라지리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대진이 탄탄한 성공가도를 질주하는 동안 노장진은 유니폼 대신 군복을 입고 다시 한번 밑바닥으로 떨어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확인해야 했다.지난 8월초 군복무를 마친 노는 지금은 너무나 격차가 벌어진 지난날의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이대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다시 한번 해볼란다.』 못다했던 이들의 승부가 다시 한번 펼쳐지게 된 것이다.
적어도 고교시절 노장진은 이대진보다 더 많이 각광받았다.이대진은 92년 진흥고를 대붕기 준우승으로 이끌며 주목받았으나 청룡기대회 결승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노장진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또 그해 나란히 참가한 멕시코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서도 한국대표팀의 에이스는 노장진이었다.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노장진과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품의 이대진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대회에서 둘이 룸메이트로 지낸덕분.그러나 프로입단이후 둘이 걸어온 길은 너무도 달랐다.
어려운 가정환경인 노장진은 방황을 거듭하다 94년 임의탈퇴선수가 돼 현역병으로 입대했다.
그러나 다시 유니폼을 입은 노장진은 이대진에게 약속한 것처럼10월31일 애리조나 교육리그에서 다시 한번 노히트노런을 기록,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장진이는 이제 잘할 거예요.그동안의 방황은 승부욕이 너무 강하고 욕심이 많다보니 그렇게 된거예요.』 이대진은 이제야 제길로 돌아온 친구가 반갑다.못다한 경쟁을 다시 벌일 수 있게 된 것도 기쁘기만 한 것이다.
김홍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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