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鄧小平 개혁, 노무현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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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의 말 한마디에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중국 경제에 대해서는 숱한 취약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렇지만 동구가 몰락한 가운데 세계 7위의 경제력을 만들어낸 사실은 평가받을 만하다.

동구와 다른 길로 방향을 잡은 것은 덩샤오핑(鄧小平)이다. 리처드 에반스 전 주중 영국대사도 그의 저서에서 鄧시대로의 전환을 신해혁명,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20세기 중국 역사에서 3대 혁명으로 꼽았다.

鄧의 구상은 가장 중국적이었다. 어떤 목표는 그가 죽기 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심지어 어떤 것은 그가 죽은 뒤에야 실현될 장기적인 설계였다. 눈앞의 목표에 급급했다면 그 역시 한 시대의 지도자로 흘러가고 말았을지 모른다.

鄧이 '중국의 개혁과 개방, 사회주의적 현대화 건설의 총 설계자'(江澤民 전 총서기)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鄧은 "나는 경제분야에서는 아마추어"라고 말했다. 그는 제도를 바꾸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바꿨다. 그것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1976년 복권한 그는 85년부터 물갈이에 나섰다. 그때 당내에는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간부가 된 당원이 200만명이 넘었다. 86년까지 그 가운데 4분의 3을 은퇴시켰다.

물러난 당 간부들에게는 가혹하지 않았다. 관용차와 봉급을 그대로 지급했다.

간부 시절 특혜를 그대로 누릴 수 있게 했다. 화궈펑(華國鋒)의 지위를 박탈하면서도 그의 명성을 완전히 때려부수지 않았다. 87년 초 후야오방(胡耀邦)에게 총서기 사임을 요구하면서도 상무위원으로 정치국에 남도록 했다.

오히려 그가 박해받던 시절 자신을 도와준 당 고위간부에게는 엄격했다. 심지어 76년 천안문사태 직후 위기에서 보호해줬던 쉬스유(許世友)도 정치국원에서 해임시켰다.

그는 자신과의 친소관계로 사람을 바꾸지는 않았다. 패거리 교체가 아니라 세력을 바꿨다. 군화를 등산화로 바꿔신거나, 영남 인사를 호남 인사로 대체해 지지기반을 강화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정권의 안정이 아니라 역사와 승부를 걸었다. 미래를 생각하기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들을 몰아냈다. 그 대신 '더 젊고 높은 교육을 받고, 직업적 능력이 뛰어난 전문가'를 충원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검은 고양이도 흰 고양이도 아니고 쥐를 잡을 수 있는 고양이였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이 14일 종결된다. 그와 가까운 측근 중 상당수가 법의 심판을 받고 물러났다. 촛불시위의 힘을 빌린 여대야소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줬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이던 76년 천안문사건 이후 鄧에 대한 4인방의 위협이 여론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과 닮은 점이다.

盧대통령은 직무정지 기간 동안 집권 2기를 구상해 왔다. 그의 구상도 인사에 맞춰져 있다. 이미 개각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이 일부 흘러나오고 있다. 부산파 신5인방이 중용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건군 이래 처음으로 현역 대장이 구속되고, 곧 임기가 끝나는 정부 산하 단체장들이 줄을 서 있다. 김대중 정부의 인맥이 정리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우리 헌정사는 '실패한 대통령'의 역사였다. 후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을 격하해 정통성을 찾았다. 비전을 펴기보다 자신을 도운 측근에게 보답하고, 패거리로 정권기반을 다지는 데 매달렸다. 후계구도를 짰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헌재 결정 뒤 드러날 盧대통령의 구상에는 또다시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의 출발이 될 수 있도록 鄧의 방식이 반영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진국 정치부장대우

*** 바로잡습니다

5월 12일자 31면 '노트북을 열며'에서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연도는 1975년이 아니라 76년이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