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으로 박격포대 소속-방장련씨가 밝힌 孔외무 인민군전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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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공노명(孔魯明)외무장관의 인민군 복무설은 지난해초부터 일부 언론에 의해 보도되기 시작했다.
진보계 월간지인 『말』지가 지난해 2월호에서 孔장관의 인민군복무 사실을 처음 보도한데 이어 주간신문인 일요신문 최신호(10일자)가 「인민군 전사로 80일,국군장교로 5년」이란 제목으로 孔장관의 인민군 복무 사실을 다시 전했다.
孔장관의 인민군 복무설이 세간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孔장관과 인민군에 함께 있었다는 방장련(63)씨가 『말』지와 인터뷰를 자청하면서 부터.
한국전쟁 발발 당시 평양 제3고급중학교 2학년으로 17세였던방씨는 학도의용군으로 입대,50년7월 서울에서 서울출신 학도 의용병들과 합류했다.
이들은 독립연대인 105연대 15대대에 편성돼 방씨는 박격포대대 1소대 1분대 분대장을 맡게 됐는데 바로 이 분대에 당시경기중학 5학년이었던 孔장관이 소속돼 있었다는게 방씨의 설명이다. 방씨는 『孔장관이 당시 왜 이 학생부대에 오게 됐는지는 전혀 모른다』면서 다만 『당시 인공치하에서 서울 학생들도 인민군이 나오라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방씨등이 속한 15대대는 전남지방으로 내려가던중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그해 9월말 후퇴명령을 받고 북으로 퇴각했다.그러던중 전북백산에서 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졌고 그때가 방씨가 孔장관을 본 마지막이었다.
그후 방씨는 인민군 포로로 잡혀 9년간 옥살이를 했고 나중에외무장관이 된 孔씨는 의용군을 탈출,서울대법대에 입학했다.
법대 2학년 때인 53년 육군통역장교로 입대,5년간 군복무를마친뒤 대학을 졸업하고 외교관의 길로 들어섰다.
『그분이 사나이로서 비겁하지 않고 당당하게 임하면서도 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주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방씨는 그의 인간됨과 합리성을 믿기에 인민군 포로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잘못된 현실을 이해하고 도와줄 것으로생각해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했다고 밝히고 있다.
孔장관이 인민군을 탈출한 자세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孔장관이 험난한 시기에 통역장교로 자진 입대,5년간의 긴 군복무기간을 거친 것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인민군으로 복무했던 「부담」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배명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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