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 시시각각

견물생심과 언감생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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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세상에 도적이 넘친다. 골골샅샅 날도둑이요, 대명천지 낮도둑이다. 곳간 잠그면 무엇하랴, 개구멍이 문짝만 한 것을. 내남없이 드나드니 먼저 집는 놈이 임자다. 나라 살림이 내 살림이고 내 살림은 내 살림이다. 개구멍 들고 담 넘어야만 도적이랴. 제 몫 아닌 줄 알면서 공으로 받는 거나, 제 살림 아니라고 나라 살림 퍼주는 거나 도적질은 매한가지다.

이젠 말하기도 신물이 난다. 적자투성이 공기업의 성과급 잔치가 어제오늘 일이런가. 그걸로도 성이 안 차 나랏돈으로 일등석 해외여행하고 룸살롱·안마시술소 다니고 온갖 잡수당 나눠 가지며 분탕질치는 것도 매년 같은 레퍼토리다. 세지는 게 맷집이요, 커지는 건 간덩이뿐이다. 지난해 온 국민의 공분을 샀던 ‘이과수 감사’ 21명이 10억 가까운 성과급을 챙겼다니 간 부기가 푸아그라 수준이다.

매를 들어야 할 정부부처가 딴생각이니 사정이 나아질 턱이 없다. 국정감사에서 호통치는 의원 나리들도 돌아서면 마찬가지다. 퇴직 후 일자리요, 낙선 후 보금자리니 얼굴 붉혀 좋을 게 없다. 국감장에서 “고치겠습니다” 고개 숙였다가 문만 나서면 잊어버리는 공기업 사장들과 저녁자리서 만나 “우리가 남이가”를 외친다. 금융위기다, 실물위기다 근심 많은 백성들만 공연히 열받아 쓴 소주잔을 비운다. 듣도 보도 못했던 직불금 부정 수급이라는 신종 도둑질을 안주 삼아 씹으며 취한다. 이쯤 되면 글쓰는 자도 욕 한마디 안 하고는 더 쓸 수가 없다. 에라, 이 도둑놈들아.

누구는 수십 년째 같은 짓거리라지만 훨씬 깊은 게 도적질의 뿌리다. 말로는 투명 사회라는데 200년 전 모습 그대로다. 다산 정약용이 전하는 갈의거사(葛衣居士)의 외침을 들어보자. “지금 온갖 도둑이 땅 위 가득하다. 토지에서는 재결을 도둑질하고, 호구에서는 부세를 도둑질하고, 진휼에서는 양곡을 도둑질하고, 창고에서는 이익을 도둑질하고, 소송에서는 뇌물을 도둑질하고, 도둑에게서는 장물을 도둑질한다. 관찰사와 병수사들은 이들과 벗이 돼 숨겨주고 적발하지 않는다. 지위가 높을수록 도둑의 힘은 강해지고 녹봉이 후할수록 도둑의 욕심은 커진다.”

용어만 골동품스럽지 현대식 도적질과 맞춘 듯 들어맞는다. 기구하기도 하여라. 이 땅 백성들 팔자여. 전생에 뭔 죄를 졌기에 도적 무리 틈에 끼어 이리 뜯기고, 저리 뺏기며 사는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단 말이냐. 죄라면 쉽게 잊는 것 하나뿐이다. 누가 도둑질을 했다면 당장 죽일 것처럼 달아오르다 이내 언제 그랬느냐 식고 마는 냄비 근성 말이다. 그러니 도둑 잡을 줄은 알아도 도둑 들지 못하게 집안 단속할 생각엔 미치지 못할 수밖에.

도적질보다 더 나쁜 게 도적질할 마음이 생기게 만드는 거다. 귤을 탱자로 만드는 건 회수(淮水) 이북의 비바람이다. 먼저 보는 게 임자인 눈먼 돈이 널렸는데 성인군자인들 돌로만 볼 수 있겠나. 견물생심(見物生心) 풍토를 언감생심(焉敢生心) 환경으로 바꿔놓는 게 우선이다. 도적한테 솜방망이 대신 몽둥이를 들고, 도적질할 마음이 얼씬할 수 없도록 기강을 세우며, 도적질하고 싶어도 할 수 없도록 빈틈을 메우는 일이 앞서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부가 내놓는 방안이란 게 늘 신통찮다. 직불금 문제만 해도 그렇다. 곳간 털린 걸 알고도 백성들이 성낼까 덮어버렸다. 소 잃고 나온 대책이란 것도 말은 장황한데 핵심이 빠졌다. 정치권은 책임 떠넘기기와 당리당략 챙기기가 먼저다. 실효성 있는 대책은 아무래도 기대난이다.

다산이 적절한 훈수를 둔다. “도적이 생겨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위에서 태도를 바르게 하지 않고, 중간에서 명령을 받들지 않으며, 아래에서 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도적을 없애려 해도 없앨 수 없다.” 한마디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얘기다. 최고권력자가 아는 사람, 예쁜 사람, 빚진 사람들 낙하산 태워 날려보내면 애먼 귤까지 탱자가 돼 도적들 천지가 되고 만다는 말이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