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경제는 수렁에 빠지는데 개혁만 외치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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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 경제가 끝없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경제가 어려운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 양상이 갈수록 심각하게 전개되면서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다. 한국 경제가 이대로 주저앉는 것인가. 활로는 없는가.

'차이나 쇼크'의 여진과 미국의 금리인상 가능성으로 국내 금융시장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어제만도 주가가 무려 48포인트 급락해 종합주가지수가 800선 아래로 밀려났다. 환율은 급등하고 채권 값은 급락하고 있다. 주가는 차이나 쇼크 이후 100포인트 이상 빠져 '셀 코리아'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설비 투자와 내수 소비는 회복조짐을 안 보이는 가운데 금융은 불안하고 수출 여건도 악화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성장잠재력이 완전히 잠식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높아지고 있다.

왜 이럴까. 특히 한국 경제만 이렇게 심하게 죽을 쑤고 있는 것인가. 중국의 경기 조정과 미국의 금리 인상 가능성, 국제 유가 급등 등 외부 요인이 한국 경제에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바로 우리 내부에 있다. 집권 여당의 노선에 대한 불안감과 정부 정책의 불투명성, 정부의 안이한 경제 인식 등이 기업인과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그 결과 투자와 소비가 더욱 위축되고, 그런 취약한 환경에서 조그만 외부 변화에도 쉽게 충격을 받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대표와 정세균 정책위 의장이 어제 이헌재 경제부총리를 방문해 '지속적인 개혁'을 강조했다. 주식 시장은 폭락하고 경제가 위기로 치닫는 바로 그 시간에 집권 여당의 최고 책임자들은 개혁만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청와대의 직제개편안이 보도된 것을 보면 경제를 고민하는 흔적이 안 보인다. 경제는 뒷전이고, 사정이나 개혁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경제계는 총선이 끝나면 투자와 소비심리가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여당에 과반 의석을 준 데는 이런 소망도 숨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여당 쪽에서는 개혁과 분배의 목소리만 높아지고, 말로는 '민생'을 외치지만 행동은 딴판이다.

각종 경제지표는 하향곡선을 그리는데도 재정경제부는 '2분기 회복론'만 되풀이하고 있다. 공정위는 한술 더 떠 계좌추적권 부활, 출자총액 규제,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등 기업의 사기를 꺾는 궁리만 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도 기업인과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정부의 불명확한 노동 정책은 이런 분위기를 더욱 심화하고 있다.

기업인들이 투자를 하고, 가진 사람이 돈을 써야 소비도 회복되고 경제도 산다. 그런데 경제 정책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불안하고, 기업인을 죄인시하고, 가진 사람을 '악'으로 치부하는 분위기 속에서 누가 투자를 하겠으며, 돈을 쓰려 하겠는가. 요즘 중소기업인들은 사업 접을 궁리만 한다고 한다. '있는 사람'들은 재산과 자녀를 외국으로 보낼 궁리만 한다. 가계 부문의 해외송금이 급증하고, 이들 때문에 LA 등 교민이 많은 지역의 집값이 급등한다는 얘기도 있다.

청와대와 여당.행정부는 이런 현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과연 지금이 개혁과 분배를 외칠 때인지 생각해야 한다. 개혁과 분배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도 나라가 살고 난 후에 가능한 것이다. 경제가 망가지고, 경제가 무너지는 판에 언제까지 개혁만 외칠 것인가. 성장 없는 분배만 강조한 중남미 국가들이 어떻게 됐는지 똑똑히 보고 있지 않은가.

집권세력은 정신을 못 차렸다. 어떻게 하면 기업인들이 안심하고 쌓아놓은 돈을 국내에 투자할까, 무엇을 하면 소비가 되살아날까, 여기에 고민과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는 지난 1년 반을 잃어버렸다. 지금 와서 또다시 헤맨다면 우리는 다시는 탈출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질지도 모른다. 이미 반발 이상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