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칼럼>재벌,터부-고르디우스 매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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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터부(taboo:禁忌)라는 말은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군도에서 왔다.그 본래 뜻은 「신성한」이다.종교의식에 사용하기 위해따로 준비해둔 물건과 관련해 쓰는 말이다.보통 사람이 일반적인사용을 위해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매우 「실제 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는 『재벌은 안돼!』라는 「재벌터부」가모든 경제정책의 표면상 금(禁)줄이 돼 있다.중국 청나라 말기의 매판(買辦)재벌,일본의 침략전쟁재벌등 사실(史實)적 죄악 영상을 억지로 오버랩시켰다.나쁜 것은 재벌이 아 니라 매판과 침략전쟁이다.그런데 우리나라 재벌은 매판 아닌 산업에서 태어나자랐고,침략전쟁 아닌 전후(戰後)부흥을 동기로 삼았다.
「재벌터부교(敎)」는 「신성」은 없이 간단하게 터부만 설치한종교다.선한 신은 없고 악한 마귀만 있다.우익 군사정권 세력도,좌익 공산혁명분자도,행정관료도,자유지식인도,소비자도,중소기업도,심지어 재벌들 자신마저도 재벌 터부를 신앙하 고 있다.
다만 재벌 터부교는 「재벌은 사악한 것인데 현실이니까 할 수없다」는 양보적 표현에다 정신적 사하촌(寺下村)을 하나 차려두고 있다.거기서 소비자(소비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는 가계부가허락만 하면 재벌회사 제품을 사서 쓰고,재벌 터부교의 신학을 담당하고 있는 학자.언론인도 힘만 자라면 중소기업 보다 재벌회사에 그 자녀가 취직하길 바란다.영세기업에서 성장해 재벌기업으로 되는데 충분조건이 있었다면 이런식으로 물건이 잘 팔리고 인재가 몰려왔다는 사실이다.
종교가 먼저고 신학이 나중인 것은 분명한데도 똑똑한 사람일수록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재벌 터부교의 신학자역할은 대체로 경제학자들이 맡는다.그들 가운데 일부는 재벌은 경제적 합리성을 결핍하고 있으므로 곧 망할 것이 기 때문에 미리 억제돼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다른 일부는 재벌은 분배의 평등을 파괴하는 주범이기 때문에 사회정의를 위해 해체돼야 한다고주장한다.이 둘을 적당히 배합한 유파도 있다.이 모든 유파의 공통점은 자기들이 재벌 터부교의 교 도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재벌에게는 이와 같은 폐해가 있기 때문에 과학적 과정을 거쳐 재벌은 터부라고 판단했노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합리성론자 가운데는 오늘날의 글로벌 경쟁시대에는 전문업종(focus)이라야 산다는 이론을 펴는 사람이 주류다.유럽과 미국에서도 이 이론이 한동안 득세했다.그러나 업종전문화나 업종다변화(diversity)는 환경에 따라서는 둘 다 경쟁력이 있다는 견해가 학자.분석가.경영자들의 점점 커가는 일치점이다.
합리성론자 가운데는 공룡절멸론(恐龍絶滅論)에 가까운 이론을 펼치는 사람도 많다.이들은 개념상으로 재벌보다 대기업을 대상으로 삼는다.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소품종 다량생산이 통하던 「규모의 경제」시대에는 적합했으나 다품종 소량생산 이 더 잘 통하는 「범위의 경제시대」에는 재벌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편다.실은 재벌체제는 규모의 경제와 범위의 경제,이 두가지장점을 다 갖추고 있다.그래서 물론 단점도 되지만 말이다.
또 다른 합리성론자는 재벌의 독점 폐해를 거론한다.그러나 기왕에는 국내에서 재벌끼리의 같은 업종 경쟁,세계무역기구(WTO)시대에 들어 와서는 국내 재벌은 아무 보호막없이 세계의 생산자들과 경쟁을 하게 됐다.
재벌이 분배정의를 유린한다는 주장은 재벌 기업에서 종업원 급여가 더 높다는 점,더 강력한 노동조합 활동도 가능하다는 점,중소기업들은 재벌회사에 납품기회를 획득하려고 노력한다는 점등으로 보아 사실무근이다.재벌기업의 대주주 소유주식을 분산해야 한다,경영을 전문경영자의 수중으로 넘겨야 한다등의 주장은 그렇게했을때 과연 그 기업의 주가(株價)가 어떻게 될까하는 질문을 해보면 안다.필자가 친구들에게 물어본 바에 의하면 주가가 떨어진다는 대답이 전부였다.
나는 「재벌 터부교」가 경쟁력 살리기를 위한 옳은 정책이 나오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방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역설적으로 말하면 재벌은 결코 「신성한」 존재가 아니므로 「터부」도될 수 없다.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 매듭을 손으로 푸는 대신 칼로 벤 것 같이 「재벌」 아닌 「재벌터부」를 그렇게 베어버리는 그 누가 나오기를 기다린다.그 때까지는 새로 만든 「경쟁력 강화추진위원회」도 그 많은 추진위원회의 하나로서 유명무실하게 잠꼬대나 하고있게 될 것이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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