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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컷 울고 죽진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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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울음은 삶의 정서적 순환에 없어선 안 될 것이다. 울 일이 있으면 울어야 한다. 실컷 울다 보면 스스로 “이젠 그만 울고 일어서자”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실컷 우는 것이 되레 새 희망과 새 힘이 되는 경우가 적잖다. 건축가 김중업 선생은 생전에 “집 어느 구석에서든 울고 싶은 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살다 보면 울고 싶은 때가 있다. 하지만 정작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혼자서 실컷 울고 싶은 데를 찾기란 쉽지 않다. 고(故) 최진실씨는 화장실이 유일한 울 곳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제대로 속 시원히 울지 못해 결국 그렇게 생을 마감했던 것이 아닐까. 정말 속 시원히 울었다면 다시 일어나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을 것이다.

# 웃는 것이야 어디도 상관없다. 하지만 우는 것은 아무 데서나 울 수 없다. 세상 풍파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아버지가 요즘처럼 힘든 세월일지라도 자식들 앞에서 엉엉 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때로는 그렇게 우는 아버지의 가슴 절절한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느낄 필요도 있다. 그것이 아비와 자식들 간의 가장 진솔한 소통의 매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철없는 아이들은 아버지가 왜 그렇게 우는지 모른다.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이 되레 아비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 그렇다면 아내가 울 곳은 어디일까. 집에서 어머니란 존재가 울 수 있는 곳은 기껏해야 부엌 구석 같은 곳 아닐까. 그나마 화장대 앞에서 우는 것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긴 하지만 그 우는 모습을 보는 남편은 여지없이 한마디 날리기 일쑤다. “웬 청승이냐”고. 아내가 울 때 제아무리 살가운 남편일지라도 그 속마음을 다 모르고, 자식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그저 혼자 숨어서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요즘처럼 살벌한 세상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때로는 구차하리만큼 아부하고 쩔쩔매며 살다 보면 어딘가 숨어서 울고 싶은 때가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하지만 속 시원히 울기는커녕 울음을 삼키고 숨겨야 하는 것이 요즘 우리들이다. 어디 가서 혼자 실컷 목놓아 울고 싶지만 울 데가 없다. 사실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처지에 혼자 울 곳조차 없으면 정말이지 미쳐버릴 지경이 돼 결국엔 세상과의 인연을 송두리째 끊어버리는 경우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 김영철 국무총리실 전 사무차장(차관급)의 자살도 그런 셈이다. 김 전 사무차장은 한승수 총리의 복심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2월이었다. 당시 그는 새로 부임한 한승수 대통령 비서실장의 보좌관이었다. 그는 나보다 연배가 적잖이 많았지만 나를 깍듯이 대해줬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는 마음이 여리고 순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2002~2005년 ‘중부발전’ 사장 재직 시절 모 에너지절약 전문기업으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은 정황이 포착돼 최근 검찰 수사선상에 올랐다. 그리고 검찰 소환조사에 앞서 지난 2일 공직 사퇴를 표명했고 어제 급기야 그의 자살 소식이 들려왔다.

# 그는 정말이지 울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속 시원히 울 수 없었으리라. 결국 그는 울음을 삼킨 채 홀로 외로운 저승길을 택했다. 그의 잘못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을 정도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실컷 목놓아 울고라도 갔으면 이렇게 애달프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사는 게 뭔데 저렇게 가나. 자, 살아남은 자들이여 울자. 실컷 울자. 그리고 결코 죽지는 말자.

정진홍 논설위원